[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유신(維新)②
메이지 유신
그렇다면 일본 친구들에게 ‘유신’은 어떤 단어일까.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 소함대가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하자, 서구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하층무사들 중심으로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세력이 결성되었다. 이에 700여년 이어진 막부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1867년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하는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은 헌법제정, 근대적 중앙집권체제, 징병제 실시, 교육제도 개선, 상공업 장려 등 부국강병정책을 위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사실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근대화는 제국주의의 시발점이었다. 그 결과는 아시아 주변국과 지울 수 없는 아픈 역사를 만들었으며 원폭투하의 비극을 자초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국민적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는 바로 이 시기의 인물이다.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길을 연 인물로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이다. 이른바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야말로 오늘날 일본이 선진국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첫발이었다고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일본인에게 ‘유신’은 아주 긍정적 단어일 수밖에 없다.
무혈의 헤이세이 유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1947~ )는 일본 제93대 총리이다. 2009년 8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총 480석 중 308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면서, 민주당의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1955년 그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1883~1959; 50년대에 총리를 지냈으며 첫 번째 자유민주당 정권을 담당)가 기틀을 다진 자민당의 장기집권체제가 54년 만에 막을 내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2009년 9월 26일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하고 처음으로 소집된 임시국회에서 진행된 하토야마 총리의 ‘소신표명연설’은 당시 화제가 되었다. 총리로 선출된 자는 당선 후 처음 열리는 중의원본회의에서 자신의 국정운영이나 철학을 밝히는 연설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소신표명연설이다. 1970년 이래 진행된 것으로 대개 25분 정도의 시간을 소요한 것에 비해, 하토야마는 그 배가 되는 52분이나 진행했다.
여기서 그는 54년 만에 이루어진 자민당의 정권교체를 ‘무혈의 헤이세이(平成) 유신’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자, 말을 잇지 못하고 본인도 살짝 놀라는 것 같았다. ‘헤이세이’는 지금의 연호이다. “일본은 140년 전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대 변혁을 이뤘던 국가”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분명 메이지 유신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메이지 유신은 그들에게 완벽하게 긍정적 역사이고, ‘단어’인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듬해 6월 미군기지 이전문제,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출판사 다이슈칸쇼텐(大修館書店)에서는 매년 ‘국어사전에 실고 싶은 단어’를 모집하는데 이해 선정된 단어 중 ‘하토-루(鳩る)’와 ‘하토(비둘기)가 먹고 남긴 것(鳩の食べ?し)’이 있다. 전자는 ‘무책임한 말을 한다’ ‘말할 때마다 내용이 바뀐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고, 후자는 ‘중동무이하게 끝내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무혈의 헤이세이 유신은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그래도 나는 하토야마의 소신표명연설을 들으면서 ‘무혈의 헤이세이 유신’이라는 이 멋진 구절을 우리말로 어떻게 소화할까 고민했었다. ‘유신’이라는 단어에서 그들이 받아들이는 벅찬 역사적, 영웅적, 긍정적 이미지를 우리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10월 유신’이 가지는 이미지를 여기서 어떻게 희석해야 할 지 고민했었다.
일본 유신회
지난 20년간 일본경제의 침체는 지속되었다. 2005년 이후 총리는 매년 바뀌었고,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도 있었지만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 실망이었다. 지금 일본은 새로운 희망의 구세주를 찾고 있다. 여기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 오사카 시장이자 일본 유신회의 대표 하시모토 도루(橋下徹)이다.
<주간 아사히>는 이달 ‘구세주냐 어리석은 군중의 왕이냐’라는 제목의 연재를 시작했다. 그의 출신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모양인데, 제목만 봐도 딱히 긍정적 이야기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일본 내에서도 하시모토의 인기에 대해서 실현 불가한 이상을 추구하는 ‘파랑새증후군’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은 지난 9월 지역정당 ‘오사카 유신회’의 이름을 ‘일본 유신회’로 바꾸고 전국정당을 목표로 창당했다. “앞으로 일본의 뿌리를 바꾸어서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그의 발언에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총리 직선제, 중의원 의원수 절반 축소, 헌법개정, 공무원 신분보장제 철폐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공약을 ‘유신팔책(維新八策)’이라고 명명한 점이다.
하시모토의 당 이름은 ‘일본 유신회’이다. 분명 19세기 말 천황 중심의 정권을 수립하고 근대화의 발판을 다진 메이지 유신에 기초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는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하시모토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출산 고령화와 인구감소에 따른 일본 현실의 마이너스적 현상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바깥으로 눈을 돌리고 주변국에 대한 역사와 영토문제에 대해서 극우적 발언을 일삼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