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유신(維新)①

<그림=박은정>

‘유신(維新)’은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이다. 『시경(詩經)』대아편(大雅篇) 문왕의 덕을 찬양하는 시(詩) 중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 주나라는 고대 황제의 후손으로 아주 오래된 씨족이지만 천명은 새로워서 지금에 이르러 주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학(大學)』에도 『서경(書經)』에도 같은 구절이 있다. 주(周)의 일족이 역성혁명을 통해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것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 한 것이다. 그러니 ‘혁명’, ‘왕조교체’와 같은 뜻이다.

또한 10월 유신을 ‘The October Revitalizing Reforms’라고 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The Meiji Restoration’이라는 것으로 보아 개혁, 혁신, 소생, 부흥, 복고 등의 뜻으로도 쓰이는 단어임을 감지할 수 있다. 결코 쉬운 단어가 아니다.

희극명사 비극명사?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한다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에 ‘희극명사와 비극명사 알아맞히기 놀이’를 하는 부분이 있다. ‘부끄러운 일이 많은 생을 보냈습니다’는 서두로 유명한 이 소설의 주인공 오바 요조가 발명한 놀이인데, 세상 어느 살롱에도 없었던 기발한 것이라면서 뿌듯해한다. “명사에는 모두 남성명사, 여성명사, 중성명사와 같은 구별이 있다. 그렇다면 희극명사, 비극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테면 배와 기차는 비극명사이고 전차와 버스는 희극명사. 왜 그런지 이해를 못하는 자는 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하니 더 이상 따져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요조의 친구 호리키는 척척 알아맞힌다. 나 역시 어떤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납득한다. 담배와 주사는 비극, 약과 의사는 희극. 죽음도 희극이고 목사와 중도 희극. 그리고 삶은 비극. 아니 희극. 아니 비극. 삶이 희극명사이면 모든 명사가 희극명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유신’은 희극단어일까 비극단어일까?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한다. 최근 ‘유신’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린다. 올해가 10월 유신 40년 되는 해란다. 사실 단어 그 자체에 무슨 색깔이 있겠는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스토리를 기억하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10월 유신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지난 9월24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피해자에 대해서 공식사과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을 했다. 박 후보의 이와 같은 발표에 대해서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긍정적 평가를 하는 이도 있고 진정성에 의문을 품는 이도 있다.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박 후보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다. 특히 유신에 대해서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며 불가피성을 강조했고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10월 유신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인정한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기 위한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17일 비상조치를 발표하면서 이제까지의 모든 민주주의제도를 정지시키고 유신체제를 단행했다. 대통령의 간선제, 언론탄압, 시민의 언행권 탄압 등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이 부정되었다. 이에 1973년 유신헌법개정 100만인 서명운동을 비롯해서 1979년 부마민주항쟁 등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살됨으로서 막을 내렸다.

“우리 현대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기적적인 성장의 역사 뒤편에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고통 받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고, 북한에 맞서 안보를 지키던 이면엔 공권력에 의해 인권을 침해받았던 일도 있었다.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라고 믿는다.”

설사 그것이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박정희 시대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하지만, 박 후보의 말에 나는 ‘유신’을 완성된 ‘비극단어’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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