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일본은 지금, OO 신드롬②
갈라파고스 신드롬
최근 신문, 방송을 통해서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갈라파고스는 남미대륙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1000km 가량 떨어진 태평양에 위치한 섬 무리이다. 19개의 화산섬과 암초로 이루어진 이 섬에는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고, 세계에서 최고의 스쿠버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 섬에서 720km 떨어진 북쪽으로는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공룡이 살고 있다고 가상한 섬의 모델인 코코섬이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거대한 석상 모아이로 유명한 이스터섬이 있다.
적도의 뜨거운 태양, 드넓은 바다, 대자연의 숨결…, 온통 에메랄드로 물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갈라파고스.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섬이다.
1831년 대학을 갓 졸업한 다윈은, 남아메리카의 해안과 태평양의 섬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출항하는 비글호에 탑승했다. 그는 여러 섬을 탐험하면서 생물의 표본과 화석을 수집해 소포로 영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5년 후 귀국. 다윈이 보낸 표본과 화석은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정리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갈라파고스에서 발견한 핀치라는 새의 표본도 있었다.
갈라파고스의 섬들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곳과 교류가 없어서, 생물의 진화를 확인하는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부터 유입된 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고유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생물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핀치는 모두 13종류인데,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서 부리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부리가 다르다는 것은 먹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똑같았는데, 먹이 때문에 부리의 모양이 변화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한다. 세기의 대발견 ‘진화론’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스토리를 가진 단어 ‘갈라파고스’는, 최근 ‘갈라파고스 신드롬’ 또는 ‘갈라파고스화’, ‘갈라파고스 현상’ 더 나아가 ‘잘라파고스’(Japan과 Galapagos의 합성어)라는 용어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2009년 7월20일자 <뉴욕타임즈>에 ‘일본이 갈라파고스 신드롬에 빠졌다(The Japanese have a name for their problem : Galapagos syndrome)’는 제목의 글이 실리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이 용어는 일본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일본 휴대폰 인터넷망 i-mode를 개발한 나쓰노 다케시(夏野 剛) 게이오대 교수가 자국의 휴대폰이 기능이나 혁신성에서는 세계 최고를 자부하지만 해외로는 수출이 되지 않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제조업, 특히 IT산업이 일본 내수시장에만 고집하다보니 세계시장으로부터 고립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과거 일본은 탄탄한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적인 기술을 고수하면서도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계시장의 욕구나 국제 표준과 맞지 않는 상품은 결국 경쟁력을 잃었고 내수시장에서마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자성하는 의미로 만들어낸 신조어가 바로 ‘갈라파고스 신드롬’인데, 경영 일각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 이른바 일본의 전자산업과 관련된 조어로 ‘고립’ ‘폐쇄’ 등을 뜻한다.
특히 휴대폰은 인터넷 접속, 이메일 송수신, 신용카드, 보딩패스, 체지방 측정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추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일본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다. 세계 최첨단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세계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는, 이른바 세계시장으로부터 고립된 제품은 휴대폰만이 아니다. 미니디스크, 내비게이션 등도 마찬가지다. 소니, 파나소닉, 도요타자용차와 같은 일본의 일류기업들이 최신기능을 탑재한 상품을 출시하고 있지만 해외시장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하며 고전하고 있는 실상이다.
갈라파고스가 육지로부터 떨어져 고유한 생태계를 만든 결과 외부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단절되었다는 점, 더 나아가 육지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고유 생물종이 외래종에 밀려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착안된 것이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은 외부와 격리된 채 진화해 온 자들의 슬픈 결말을 말하고자 하는데, 이는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21세기, 세계와 소통하지 못한다면 결국 도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국가일 수도 있고, 특정 기업일 수도 있고, 한 개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