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나를 참 기쁘게 하는 선물 ‘후쿠부쿠로’

나를 참 기쁘게 하는 선물이 있다. 매년 이맘 때면 라면박스 크기의 상자가 도착한다. 종합과자세트다. 상자 안에는 비스킷, 초콜릿, 사탕, 껌 그리고 새콤달콤한 희한한 과자들로 가득하다. 이 상자에는 ‘고선윤 앞’이라고 분명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아이들은 이런 선물을 보내는 지인이 있는 엄마를 무척 부러워한다. 지금은 둘 다 덩치가 나보다 크지만 초등학생일 때는 부러워할 정도가 아니라 존경까지 하는 듯했다. 나 역시 “이건 엄마 꺼”라면서 쐐기를 박고 안방 화장대 밑에 둔다. 내 눈을 피해서 야금야금 꺼내먹는 재미도 쏠쏠했을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도착했다. 아이들 앞에서 우쭐해하는 내 모습이 웃긴 모양이다. “당신이 애유?” 남편이 핀잔을 놓는다.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 선물이 정~말 좋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외갓집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이 둘, 이모가 셋이나 있는 집에서 ‘나만의 과자’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사치였다. 할아버지가 간혹 아무도 몰래 종이에 싼 사탕 몇 알을 나에게 주면, 어린 나이에도 눈치라는 게 있어서 삼촌이랑 이모가 없는 곳에서 뽀도독 뽀도독 씹어먹던 기억이 난다. 나랑 10살 차이 나는 막내이모가 유독 신경 쓰였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가지고 나는 상자 속의 과자를 하나하나 만져본다. 매년 색다른 디자인의 새 제품들이 나를 더욱 즐겁게 한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어렵고 외로웠던 그 시절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 이런 기쁨을 보내는 분은, 20대 직장생활을 할 때 알게 된 분이니 어느새 20년지기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보지 못한지 1년이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이렇게 지속되는 관심과 사랑은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져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일본의 복주머니, ‘후쿠부쿠로’

나는 이 상자를 ‘후쿠부쿠로(福袋)’라고 한다. 일본말을 공부하지 않은 우리 아이들도 ‘엄마의 후쿠부쿠로’라고 하면서, 나보다 더 기다린다. 후쿠부쿠로의 한자 뜻을 보면 ‘복주머니’라고 할 수 있는데, 한복을 입었을 때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그 주머니와는 다른 의미의 물건이다.

정초 일본사람들의 첫 쇼핑은 후쿠부쿠로로 시작된다. 백화점만이 아니라 동네의 작은 가게에도 후쿠부쿠로라고 적은 쇼핑백이 점두를 장식한다. 장난감 가게의 후쿠부쿠로에는 장난감이, 빵집의 후쿠부쿠로에는 빵이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백화점처럼 다양한 물건을 파는 곳의 쇼핑백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가격보다 훨씬 많은 물건이 들어있다는 사실인데, 여기에 본인이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가 관건이다. 어쨌든 공개되지 않은 물건에 대한 기대, 더 나아가 행복과 행운을 얻으려는 마음이 이것을 구매하게 만든다. 후쿠부쿠로에는 ‘복’이 함께 한다는 막연한 생각도 한몫 하는 것 같다.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빼빼로데이 하면서 초콜릿과 사탕을 파는 상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정초 이른 아침 도쿄의 백화점 앞에는 후쿠부쿠로를 사기 위한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는 곳도 있다고는 하지만.

새해는 동일본대지진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정월이라 이와 관련된 상품을 담은 후쿠부쿠로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의 유명 백화점에서는 피해지에 자원봉사 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비옷과 배낭, 지진 후 교통마비로 귀가를 하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 접이식 자전거와 헬멧, 재해 때 필요한 라디오와 휴대용 가스렌지, 겨울철 절전을 위한 내복과 탕파, 이런 것들을 담은 후쿠부쿠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동일본대지진과 관련된 상품은 이런 것만이 아니다. 대지진으로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느끼면서 사람들과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상품들도 있다. 이를테면 온천 숙박권, 고급레스토랑 식사권, 리조트행사 초대권 등이 그렇다. 사람들과의 인연, 정(情)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느낀 2011년의 정서를 반영한 모양이다.

상록보육원에 쏟아진 후쿠부쿠로

서울 소재의 상록보육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난번 소개한 나의 20년지기한테서 종합과자세트 80박스가 전달됐다는 것이다. 상록보육원은 아이들 봉사점수 때문에 인연을 맺게 된 곳인데, 이제는 내 마음의 쉼터 같은 곳이 되었다. 보육원 식구들은 항상 따뜻하다. 이미령 사회복지사님은 큰언니 같고, 아이들은 조카처럼 따른다. 밥도 차도 얻어먹으면서 오히려 내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지난 여름 보육원 아이들 야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올겨울에는 이런 선물까지 보내신 거다.

사회복지사님의 웃음 가득한 얼굴, 좋아라 깡충깡충 뛰는 아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며칠 전 올해는 IMF때보다 더 썰렁한 겨울이라고 우울해하셨는데…. 과자 박스는 행복한 새해를 선물했다.

내가 후쿠부쿠로라고 명명한 이 과자상자에는 분명 ‘복’이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