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양력과 음력

한국 명절은 ‘음력’, 일본 명절은 ‘양력’

추석 일주일 전, 9월 22일 내 생일이었다. 때마침 배달된 추석 선물 꾸러미는 모두 내 생일선물이라고 우기고 “이놈의 인기는 어쩔 수가 없어”라면서 우쭐댔다. 양력 9월 22일은 음력 8월 15일 우리의 한가위 언저리에서 맴돌다보니 내 생일은 추석 때문에 묻히기도 하고 때로는 덕을 보기도 한다.

이번 생일에는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작은 소원을, 추석이라 케이크 같은 건 생각도 말라고 단칼에 거절하는 엄마의 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럽게 울었던 날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날이 마침 추석이라 생일상을 크게 받아본 적도 있다.

90년대 초의 일이다. 이장호 감독의 촬영팀을 따라 나선 사할린에서 추석을 맞이했다. 마침 그날이 9월 22일이었다. 당시 사할린은 ‘대자연’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칫솔을 잊고 온 미남 배우는 그것을 구하지 못해서 한 달 내내 양치질을 못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이런 곳이었지만 어디서 구했는지 선물을 하나씩 건넸다. 꽃다발도, 마트로시카 인형도 받았다. 그리고 김지미 여사는 케이크를 준비해주셨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화려한 생일날이었다.

이제 몇 살이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며 ‘○○띠’라고 말한다. 그러면 다들 나보다 1살 많네, 2살 어리네 하면서 이해한다. 띠는 역시 음력으로 따진다. 음력으로 돼지해 12월이 생일인 우리 딸의 양력 생일은 쥐해 2월이다. 딸아이는 “돼지띠가 아니라 미키마우스 띠”라고 우기지만 그래도 띠는 돼지띠다. 띠를 가지고 나이를 따지면 그것은 ‘세는 나이’이고, 생일을 가지고 나이를 따지면 그보다 적다. 말하는 시점이 생일 전이면 2살, 생일이 지났으면 1살 어려진다. 공식서류 같은 것에는 ‘만○세’라면서 후자의 나이를 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세는 나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다. 이러니 나는 어느 쪽이 진짜 내 나이인지 헷갈렸고, 그러는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내 나이가 몇인지 모르면서 살고 있다.

시집간 첫날 나는 큰형님으로부터 ‘집안행사날짜’가 빼곡히 적힌 메모를 한 장 받았다. 조부모의 제삿날부터 아버님 어머님의 생신 그리고 조카들 생일까지 A4용지 한 장을 채우고 있었다. 메모지의 날짜 중 제사는 당연히 음력이고 시어른의 생신 역시 음력인데, 그 다음은 이것이 음력 날짜인지 양력 날짜인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대개 우리 동기의 생일은 음력이고 조카들의 생일은 양력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누구의 생일이라는 글을 보고 축하메시지를 보내면 “내 생일은 음력이랍니다”는 글을 받는다. 이런 일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음력과 양력을 같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말부터 양력을 사용하면서 공식적 행사는 대부분 양력을 사용하지만 설과 추석, 정월대보름, 사월초팔일, 단오와 같은 우리 고유의 명절은 음력을 사용하고 있다. 각 가정에서는 제사와 생신을 음력으로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집도 아빠의 생일이 매년 달라지니 헷갈린다고 퉁퉁거리지만 오랜 약속이라 어쩔 수 없다.

한국을 찾은 일본 친구 중에는 점집에 가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 한국의 토속 샤머니즘을 운운하면서 ‘무당’을 보고 싶어 한다. 나도 딱히 단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가의 ‘사주카페’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사주’를 모른다는 것이다. 사주란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인데 당연 음력의 날이다.

일본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문명개화를 시도했고, 1872년 태음력을 폐지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모든 행사를 양력에 따랐다. 새해를 시작하는 설은 물론이고, 단오도 칠석제도 양력 5월5일, 7월7일이 그날이라고 한다. 그러니 자신의 음력생일을 알 리가 없다. 하물며 ‘음력’이라는 거 자체가 있다는 것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 생활 속에서 쓰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뭐 그래도 최근에는 양력생일을 가지고 바로 음력생일을 알 수 있으니 점을 보는 데도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없다.

일본도 점보는 것을 좋아한다. 혈액형, 별자리, 손금, 카드 점 등이 유행하는데 굳이 생일을 가지고 점을 보는 게 있다면 별자리 점일 것이다. 태어난 달과 날에 해당하는 별자리를 찾고 그것의 운세를 점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것이니 처녀자리, 전갈자리 같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양력의 날을 가지고 점친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일본 친구를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몇 살이냐는 질문에 살짝 당황한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는 ○살인데, 일본나이로는 ○살이다”고 친절하게 말하고 한국의 나이 세는 방법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냥 ‘만○살’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메이지 이후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하면서 더 이상 동양적 생각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내년 2013년 한가위는 올해 9월 30일보다 11일 빠른 9월 19일이다. 내 생일 22일은 추석 3일 후, 추석연휴 후유증으로 끙끙 앓고 있는 시간일 것이다. 내 생일은 이렇게 매년 추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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