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람들
만남에는?여러 가지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가벼운 만남이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고, 천년만년 함께할 것 같은 요란한 만남이 소홀해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 내가 만난 이 사람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나직한 향을 자랑하는 난 하나
2009년을 마감하는 추운 겨울날, 나는 졸업하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사학과 동문회에 나갔다. 매년 초대장을 받았지만 내가 참석하지 않은 까닭은, 솔직히 내가 뭘 하고 사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명함을 내미는 선후배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질 것이 뻔했다. 학위논문을 제출한 지금, 이제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나의 20년을 설명할 수는 없었고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오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나를 표현하고 싶었고 축하받고 싶었다. 그 첫나들이인 셈이다. 크리스마스 장식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명함을 나누어가지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내놓을 수 있는 명함이 없는 나는, 역시 지금 내가 뭐하고 사는지 설명하기는 어려웠고 살짝 주눅도 들었지만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자랑스러운 사학인’으로 선정된 세분을 축하하는 일이었다. 초대장에서 그분들의 성함을 보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훌륭하신 분들이라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세분 중 한분이 ‘3·1여성동지회’의 회장이신 박용옥 선배님이셨다. 물론 이날 처음 뵈었다.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면서 몇 마디 나누었고, 귀가길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내가 모시게 되었다.
선배님만 내 차를 탄 것이 아니라, ‘축하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많은 꽃다발과 화분도 함께했다. 트렁크 문을 제대로 닫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몇 개의 화분을 동료들에게 나누어드리고는 다 실었다. 난향으로 가득한 차안에서 선배님과 둘만의 공간을 가진 나는 애 키우고 살림 살면서 어렵게 논문을 마쳤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리고 나도 뭔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시절에 여자로서 엄마로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공하신 선배님께서는 다 이해한다고 하셨고, 분명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그 말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고 꽃다발과 화분들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헤어지는 순간 선배님께서는 나에게도 작은 화분을 하나 주셨다. ‘축하합니다 – 남동순’이라는 리본이 달린 화분을. 그리고 이 화분을 보내주신 분이 유관순 열사와 같은 연배의 107세 어른이라는 설명을 자세하게 해주셨다. 좋은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좋은 기운이 가득 담긴 화분이 분명하다. ‘축하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나직한 향을 자랑하는 난 하나 얻고서 싱글벙글. 마치 내가 축하받은 양 거실에 두었다. 몇 달이 지나자 난은 시들고, 빈 화분은 베란다 한구석에 내놓았다. 그래도 ‘축하합니다’라는 리본만은 거실 벽에 걸어두었다.
남동순 할머니와의 만남
2010년 4월초 봄기운이 막 돌기 시작하는 날, ‘유관순 열사 친구 남동순 할머니 별세’라는 기사를 보았다. 유관순 열사의 소꿉친구이며 독립운동가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을 신문지상을 통해서 알았다. 3·1운동 직후 해공 신익희 선생이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7인 결사대’에 유일한 여성 대원으로 참가해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접했다. 남동순 할머니,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나와는 이런 묘한 만남을 하고 가셨다. 나는 그 기사가 담긴 신문을 한참 들고 있었던 날을 기억한다.
3·1여성동지회는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여성독립운동자가 중심이 되어 1967년에 창립한 단체이다. ‘일제의 잔악한 총칼 앞에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마칠 수 있었던 그 숭고한 이념은 밝아 오는 새 역사창조의 모든 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설립취지문의 한구절을 접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야만 했던 그 모진 역사 속에서 살아온 유관순 누나, 남동순 할머니 역시 대한의 예쁜 딸들이다. 이제?그들은 나에게 역사 속 한줄의 인물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람들로 느낀다.
1919년3월1일은 멀고 먼 옛 시간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숨 쉬고 살았던 시간임을, 그리고 그 시간의 의미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축하합니다 ? 남동순’이라고 적힌 그 리본을 통해서.
남동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사회를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빛바랜 리본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오늘 독립운동을 외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노래 가사말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만남이 있고,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는 만남도 있지요.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님들을 글로나마 접할수 있어 보는 우리도 감동입니다.
”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