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레미제라블, 다섯 번의 만남

마리우스 <그림=박은정>

연말연시 모임이 있을 때마다 <레미제라블>에 대한 이야기가 한자리를 차지했다. 영화를 봤니 안 봤니, 재미있니 없니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완역본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공군이 패러디했다는 <레밀리터리블>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몫을 한다.

첫 번째 만남

<레미제라블>과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동경한국학교 도서실에는 주황색 하드커버의 계몽사 문학전집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서실을 찾은 이유는, 한국에서 막 전학 온 외톨이 사춘기 소녀가 남들과 타협하지 않고 자유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글자’를 보는 것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를 찾고 있었다. 누구도 잘 찾아오지 않는 4층 구석진 어두운 방에는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나 역시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빵 한 조각을 훔치고 19년간 감옥살이를 했다는 장발장의 이야기에 나의 작은 가슴은 먹먹해지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

두 번째 만남은 중학교 때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다. 이와나미 소년문고(岩波少年文庫)판 <레미제라블> 상·하 2권을 여름방학 내내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매료되었던 시절이라 프랑스혁명 그 무렵의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 재미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15년부터 1832년 사이의 프랑스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이나 1871년의 파리코뮌과 연결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타가나로 표기된 판틴, 코제트, 테나르디에 등의 서양 이름이 헷갈렸다는 기억만 생생하다. 일본 문자에는 히라가나와 가타가나 2종류가 있다. 보통 히라가나를 쓰는데 외래어나 고유명사 같은 것은 가타가나로 쓴다. 문장 속의 수많은 가타가나 이름이 마치 길바닥의 돌부리처럼 걸려서 잘 읽혀지지 않았다. 어찌하랴 독후감은 써야 하니, 책장을 앞으로 되돌리고 다시 읽어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교회 촛대를 훔친 장발장을 감싸준 신부님의 이야기에 감동했으며, 코제트의 사랑 이야기에 가슴을 설레었다.

세 번째 만남

세 번째 만남은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이다. 피카딜리 서커스 지하철역에서 어학원으로 가는 길목에 커다란 눈방울의 여자아이가 그려진 <Les Miserables> 뮤지컬의 간판이 1년 내내 걸려있었다. 왜 하필이면 코제트의 얼굴일까? 코제트 스토리를 잠시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도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난한 학생에게 뮤지컬은 딴 세상의 이야기였고, 극장 밖 런던 골목골목에는 볼거리가 넘쳐났다.

1985년 초연한 이래 아직도 런던에서 공연 중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다시 런던을 찾을 기회가 있다면 이번에는 제일 먼저 극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월 때문에 생긴 여유인지 안목인지 모르겠지만, 꼭 그러고 싶다.

네 번째 만남

네 번째는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요일 오후 ‘EBS 일요시네마’에서의 만남이다. 흑백이라고도 칼라라고도 할 수 없는 흐릿한 색에 친절하지도 않는 자막이었지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조용한 감동에 젖었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20편이 넘는다고 하니 그 중 하나일 게다. 여하튼 어린 시절 글자 속에서 읽지 못한 장발장과 자베르의 대립되는 존재감이 벌떡 다가왔다.

다섯 번째 만남

그리고 최근 다섯 번째 만남이 있었다. 그렇다. 휴 잭맨 주연의 무비컬(movical) <레미제라블>이다. 작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에 개봉한 이래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뮤지컬 배우가 아닌 할리우드 배우가 그것도 다 아는 내용을 가지고 얼마나 감동을 만들 수 있을까 살짝 의문을 가지면서 조조 예매를 후회하기도 했다. 이른 아침이라 졸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기우였다. 웅장한 첫 장면부터 매료되어 팝콘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이라이트는 바리케이트 장면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revolution’이라는 단어가 들리고 4분의 4박자의 혁명가는 80년대 대학가를 연상시켰다. <레미제라블>의 주제는 결코 민중혁명이 아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만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이 부분이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두드러졌다.

매번 만날 때마다 다른 장면이 읽히는 건 분명 <레미제라블>이 대작이기 때문일 거다. 엄청난 분량의 그것을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것처럼 더듬고 있으니 말이다. 완역본을 읽기 시작한 아들놈이 “책에서 장발장 이름이 나오는 건 100쪽이나 넘겨야 비로소 나온다고”라면서 거들먹거린다. 이제 드디어 ‘장발장’ 단어를 찾은 모양이니, 100쪽은 읽는 모양이다. “우리가 아는 장발장 이야기는 부분에 불과해.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와 풍습, 그리고 다양한 문제에 관한 빅토르 위고의 해박한 견해가 서술된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다. 잘난 척하면서 5권의 완역판을 들고 마루바닥을 뒹굴고 있다.

One comment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