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정로환과 러일전쟁

<그림=박은정>

할머니 기일이라 여럿 모였다. 슬하에 6남매를 두셨고 그 손자가 열넷이나 된다. 그 중 맏딸의 맏이인 내가 당연 대장이다. 어릴 적엔 휘하에 거느렸는데 이제는 덩치가 산만한 놈도 있고 나보다 더 큰 자식을 둔 이도 있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좀을 완치할 수 있는 비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문의 둘, 의대생 둘은 말이 없는데 막 제대한, 아직 군인 냄새가 빠지지 않은 싱거운 녀석이 아주 자신 있게 떠든다. “정로환 30알을 식초에 녹여서 물로 희석한 다음 발 담그기를 30분, 이것을 5일만 하면….” 말하는 놈도 웃기지만 메모까지 하면서 “물은 몇 대 몇으로 희석해야 하지?”라고 묻는 놈은 더 웃긴다.

호랑이연고

하기야 누구의 손자들인가. 우리 할머니, 호랑이연고에 대한 맹신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호랑이연고를 양관자놀이에 발라주셨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꼽 위에 발라주셨다. 희한하게도 효력이 있었다. 우린 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호랑이연고는 ‘진짜 호랭이 지름(호랑이 기름)’을 짜서 만든 특효약으로 알았다.

물론 알고 있겠지만, 호랑이연고는 호랑이 기름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싱가포르 화교 후원후(胡文虎)와 동생 후원바오(胡文豹)가 그들의 이름을 딴 제약회사 ‘호표행(虎豹行)’을 설립하고, 거기서 만든 것이라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병에 든 박하향 연고는 타박상, 근육통, 가려움 등 다양한 증상에 효과가 있다고는 하나 온갖 병에 다 효과가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정로환

정로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복용하는 약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릴 적 장이 좋지 않아 고생을 할 때 나는 마치 보약인양 끼고 살았다. 그 고약한 냄새도 이제는 나쁘지 않다.

‘정로환(正露丸)’이라.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이름은, 실은 러일전쟁과 관련이 있다. 청일전쟁 시 위생적이지 못한 수원(水源)에 따른 전염병으로 고생을 한 일본군은, 크레오소트가 티푸스균을 억제하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장병들에게 이것을 대량 배부하고 연일 복용하도록 했다. <육군의학잡지>에 따르면, 이 약을 1901년에는 ‘크레오소트환’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에는 정로환(征露丸)이라고 달리 기록한다. 정복할 ‘정(征)’ 러시아를 뜻하는 ‘로(露)’, 한마디로 ‘러시아 정복’이라는 노골적인 뜻을 담은 이름으로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복에 일조한 ‘만능약’은 많은 제약회사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제조 판매되었고, 이후 일본 독자의 ‘국민약’으로 보급되었다. 2차대전 후, 정로환의 정(征)자를 바를 정(正)으로 개정하였으나, 아직도 정복할 ‘정’자의 ‘정로환(征露丸)’을 고집하는 제조회사도 있다. 2007년 자위대의 국제연합 네팔지원단 파견 시에도 비품으로 배급되었다.

러일전쟁

러일전쟁은 조선과 만주의 분할을 둘러싸고 1904년 일본함대의 뤼순 공격으로 시작해서 이듬해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러시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영일동맹, 미국의 일본지원, 러시아 프랑스 동맹이 관련된 제국주의 전쟁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이것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제국주의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교학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메이지유신은 소수의 관료집단이 정권을 독점하여 군국주의 정신을 국민에게 주입하고 재벌을 육성했다. 그 결과 소외계층이 증가하고 협소한 국내시장과 원료부족으로 산업의 성장도 제약을 받았다. 정부는 이 모순을 대외 침략으로 타개하려했다. 일본은 열강의 함포외교를 흉내내어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강요하고, 조선침략을 방해하는 청 및 러시아와 충동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침략의 발판을 마련했고, 러일전쟁으로 조선병탄의 승인뿐 아니라 만주에 대한 특수권익 확보했다.

그렇다면 정로환까지 대동된 러일전쟁을 일본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실은 <료마가 간다>는 작품으로 알려진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가 1972년에 완결한 장편소설 <언덕위의 구름>을 드라마화 한 것이 최근 3년간 NHK에서 방영되었다. 테마는 러일전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고 적지 않은 팬을 확보했다.

러일전쟁의 직접원인을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비롯된 러시아의 만주지배’에서 찾는다. 러시아가 만주를 지배한다는 것은 대륙으로 이어진 조선반도까지 진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반도에 러시아 세력이 진출하면 일본 역시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 방어를 위해서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구하기 위한 애국적 전쟁, 국가적 위기에 맞선 일본의 자위적 노력이었다고 합리화한다. 이른바 먹히지 않기 위해서 먹어야 했다는 러일전쟁에 대한 설명은 러일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희석하고, 이후 계속되는 근대 일본의 전쟁에 대한 역사관으로 이어진다.

러일전쟁에 대한 이런 인식은 어떤 특별한 사학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안방극장을 장악한 대하드라마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갔고, 이것이 평범한 일본인의 머릿속에 그렇게 그려졌다. 시바 료타로의 기본 생각은 ‘당시 일본에는 조선이 러시아의 영토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은 최선을 다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고, 러일전쟁이다.’ 이 생각은 <언덕위의 구름>을 통해서 일반적 사관(史觀)인양 전파되었다.

살다보면 세상은 진실보다 더 확고한 믿음을 주는 것이 있다. 야! 이놈아, 제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매형이 쓰다 남은 무좀연고나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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