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겨울밤 유혹하는 ‘고타츠’

할머니의 상자

몇 달 전 일본에 계시는 어머니로부터 소포를 받았다. 뜯어보니, 가로세로 2미터는 되는 커다란 이불과 방망이가 2개 들어있었다. 여기저기 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칼국수 밀 때 쓰라고 어디서 주어오신 모양이다. 이불 역시 새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손수 뜨신 조끼, 센베이 과자, 부엌에서 쓸 물건들 이것저것 그리고 방망이 2개. 눈도 안 좋으신 분이 손자 입히려고 뜨신 모양이다. 앞판과 뒷판의 색이 다른 걸 보니 남은 실로 작품(?)을 만드신 게 분명하다.

반갑지 않은 물건들도 있지만, 어머니의 낙인지라 뭐라 할 수도 없다. 어머니가 보내시는 상자 안에는 별것별것 이상한 것들이 참 많다. 그래서 아이들은 할머니가 보내는 상자를 ‘도라에몬 상자‘라면서 재밌어한다. 만화 주인공 도라에몬의 주머니에서는 별 요상한 물건들이 마구 쏟아지기 때문이다.

오늘 드디어 방망이 4개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잘 생긴 젊은이가 가로세로 1미터 정도 되는 판자를 2장이나 들고 왔다. 일본에서 어머니께 도움을 받은 사람인데, 따님께 전해주라고 해서 가지고 왔다는 거다.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미안할 수가. 들기도 불편한 이런 짐을 부탁하다니, 거절도 못하고 얼마나 황당했을까. 시어머니께서 이러셨다면 신랑한테 흉이라도 보겠는데, 친정어머니라 마음이 짠~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시집갈 당시 마침 일본에 여행 간 선배 편으로 이불을 보낸 적도 있다. 승용차 뒷자리를 꽉 메운 이불 두 덩이를 싣고 직장 주차장으로 왔을 때, 그 황당함이란…. 지금도 선배를 만나면 첫인사가 “이불 잘 쓰고 있습니다”이다.

일본에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성격이 급한 분이라 당신이 하시고 싶은 말만 하고 끊으니 집중해서 잘 들어야 한다. 내용은 친구가 새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고타츠’를 버린다고 하길레 얻어서 보냈다는 거다. 노인들을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맨션이라 좁은 공간이지만 휠체어 탈 공간도 마련되고, 난방도 잘 된다고 부러워하신다. 그건 그렇고, 고타츠는 한번에 보내기 어려워서 분해했으니 잘 조립해서 딸아이 방에 넣어주라신다. 지난번 외갓집에 갔을 때 딸아이가 고타츠를 탐낸 걸 잊지 않으신 모양이다. 온돌방에 무슨 고타츠냐고 무시했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던 거다.

고타츠

발열용 전구가 달린 판자에 4개의 방망이(다리)를 조립하고, 그 위에 가로세로 2미터의 이불을 씌우고 다시 판자를 올리니 ‘고타츠’가 완성되었다.

고타츠는 14세기경부터 사용된 일본 난방기구의 하나다. 전통일본가옥에서는 마룻바닥 한가운대를 사각형으로 도려 파서 불을 지피는 ‘이로리(??裏)’가 난방과 취사를 담당했었다. 여기에 틀을 놓고 이불을 씌운 것이 고타츠의 시작이다. 에도시대 중기에는 이로리 대신 화로를 사용하면서 이동이 가능해졌고, 전후(戰後)에는 적외선을 열원으로 하는 지금의 고타츠가 등장했다.

노다메의 고타츠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우리 딸과 같은 청소년들이 ‘고타츠’에 대한 관심 내지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만화원작의 일본드라마 <노다메 칸다빌레> 때문일 것이다. 씻기도 싫어하고 청소도 싫어하는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는 괴짜 음대생 노다메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지휘자 지망생 치아키 선배를 짝사랑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여기에 고타츠가 등장한다.

‘냄비전골을 먹을 때는 역시 고타츠에서…’라면서 노다메는 치아키의 방으로 고타츠를 들고 오지만, 치아키는 ‘이불달린 촌스러운 테이블’이라고 싫어한다. 그런데 따끈한 고타츠 속에 발을 넣고 전골을 먹은 치아키 역시 세상만사 다 귀찮아지고 고타츠 속에서 잠이 든다. 고타츠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그 누구도 쉽지 않다. 정신을 차린 치아키의 대사가 완벽하다. 고타츠를 잘 설명하고 있다. ‘느긋하고 공격성 없는 평화의 상징 같은 존재, …따끈따끈한 온도와 이불로 몸과 머리와 감각을 둔하게 해서 인간을 타락시킨다.’

겨울밤의 풍경

일본의 겨울밤, 온가족이 따끈한 고타츠 속으로 발을 넣고 몸을 녹인다. 하루의 피로도 녹인다. 식사를 하고, TV를 보고, 귤을 까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테이블 밑에서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발을 꼼지락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누워 잠이 들기도 하고, 따뜻하고 행복한 그리고 느긋하고 게으른 겨울밤이 그려진다.

어릴 적 대구 외갓집 안방 아랫목에는 항상 이불이 깔려 있었다. 차가운 손발을 쏙 집어넣고 몸을 녹이다 잠이 들기도 했다. 이모들이 교복을 입은 채 이불 속에서 속닥속닥 나누는 이야기는 마냥 부러운 숙녀들의 세계였다. 늦게 퇴근하시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묻어둔 밥을 잘못해서 차기라도 하면, 몰래 이불속을 빠져나와 딴청을 부리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외갓집의 겨울밤이다. 우리 딸아이의 외갓집 겨울의 기억 속에는 아마도 ‘고타츠’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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