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감사일기①] “감사하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리니”

“아들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정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먼 길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뜻해 지기를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은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본문 중에서) <사진 이영준 독자>

밤이 되면 달빛에 동해의 검은 바다가 번쩍거린다. 바다의 검정보다 더 깊은 검은 산자락이 양쪽에서 바다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짙고 옅은 한 폭의 수묵화가 된다. 차디찬 겨울 밤바다 위의 오징어잡이 배의 외로운 불빛이 파도에 떨고 있다.

노년에 맞이하는 적막한 밤이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창가에 놓인 작은 시계의 초침 소리가 시간의 벽을 두드리고 있다. 팽팽한 겨울 허공에 떠 있는 미묘한 표정의 달을 쳐다보면서 나의 상념은 지나온 먼 시간의 따뜻했던 곳을 찾아가고 있다.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은 나의 내면에 고드름이 얼게 한다. 나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감사했던 장면들을 기억의 서랍을 열어 뒤적거린다. 청록색 안개 저 쪽에서 한 장면이 나타난다. 기울어져 가는 낡은 일본식 목조주택의 이층 구석방에 불이 켜져 있다. 거기서 한 청년이 법서를 앞에 놓고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다. 그 동네는 서민한옥들이 들어차 있었다. 눌리는 듯한 낡은 기와 지붕들이 우중충한 모습으로 퍼져 있었다.

열평 정도의 한옥인 앞집의 할머니와 그 외아들은 뒷집에 밤늦게까지 켜진 불을 매일 보고 있었다. 그 집 아들도 공무원 승진시험을 보기 위해 건넌방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앞집 할머니는 어느날 신문지에 싼 소고기 한근을 공부하는 청년이 있는 뒷집 대문 아래 말없이 밀어놓고 갔다. 공부하는 청년이 영양보충을 하라는 선물이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명절이라야 고기 국물을 먹을 수 있던 때였다. 그 앞집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가난 속에서 혼자 외아들을 키운 사람이었다. 남을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2층방에서 공부하던 청년이 나였다.

그때 감사했던 기억이 오십년이 넘어 바닷가 실버타운의 방에 혼자 누워 잠 못 이루는 나의 영혼 속에서 작은 촛불같이 피어올라 마음을 덥혀주고 있다. 이미 그 할머니는 저 세상으로 옮긴지 오래다. 그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세배를 갔던 기억도 난다. 앞 뒷집으로 오랜 이웃이었다.

어머니가 해방 다음 해 결혼하고 서울 시집에 왔을 때 앞집 할머니의 외아들은 꼬마였다고 했다. 그 꼬마가 혼자 놀다가 심심하면 새댁인 엄마가 일하는 부엌으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내게 유언을 했던 생각이 난다. 시집 왔을 때 앞집 꼬마가 자주 와서 정이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꼬마를 찾아서 어머니의 돈을 좀 전해주라고 했다.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의 그 꼬마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수소문해서 그 앞집 꼬마였던 분을 찾았다. 그는 오래 전에 정년 퇴직을 하고 칠십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뜻을 전하고 돈이 든 봉투를 건넸다. 잠시 침묵하던 노인의 눈이 글썽거리더니 하얀 눈물이 뚝 떨어졌다. 노인은 꼬마의 눈으로 보았던 어머니의 처절했던 고생의 기억 한 장면을 내게 전해 주었다.

노인은 내가 성묘를 하러 갈 때 꼭 함께 가자고 했다. 어머니의 묘 앞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까 눈가가 촉촉해 지는 게 마음이 훈훈해 진다. 그러고 보니까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면서 어머니의 의식이 아직 있을 때 인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감사하다는 말을 안해도 어머니는 다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고맙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했다. 아들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정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먼 길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뜻해 지기를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은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있는 자는 더 가질 것이요 없는 자는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있는 자라는 말에 감사가 있다고 대입해 본다. 감사하면 더 감사할 일이 늘어나고 그게 없으면 현재의 행복마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는 뜻은 아닐까. 앞으로 우울해질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감사일기’를 적어두어야겠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들과 그때의 행복한 감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적어두고 싶다. 인생 황혼의 어스름이 내리는 속에 혼자 있게 될 나를 위해 현재의 내가 느끼는 흐뭇한 감정을 저축해 놓는 월동준비다. 그때가 되면 조금씩 꺼내 마음속 벽난로에 넣고 불을 피워야겠다. 누구라도 함께 불을 쬐면 더 좋을 것 같다. 감사하면 따뜻해지니까. 행복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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