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20년 전 한 대법원장의 죽음이 던진 메시지

김이조 변호사는 내게 대법원장의 자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6.25전쟁 때, 자살한 그 분과 함께 지금의 수도군단인 당시 6관구사령부에서 같이 근무했어요. 그때 식당을 관리하는 본부대장이 전두환이었죠. 김재규 재판 때 신군부에서 대법관을 다 찾아다녔는데 자살한 그분이 주심을 맡도록 의도적으로 배당을 했다고 들었어요. 자살한 대법원장은 아프고 고독해서가 아니라 정권과 타협한 것 때문에 평생 괴로웠을 겁니다.” (본문에서) 사진은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생명의 전화

2005년 1월 17일 오후 5시경, 팔십대 중반 노인이 마포대교 난간을 힘겹게 올라가 한강으로 뛰어내렸다. 유서는 없었다. 전 대법원장이었다. 신문은 자살 원인을 노환에서 오는 고통과 우울증이라고 했다.

그 무렵 언론은 안동일 변호사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안 변호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라는 책을 발간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김재규는 유신체제가 곧 박정희이고 그가 없어져야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된다고 했어요. 저는 김재규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진실하다고 느꼈어요. 실제로 그렇게 됐지 않습니까? 박대통령이 산업화를 위해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유신체제가 없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거죠. ”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에 전두환의 심복이 깊이 관여했다고 폭로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김재규가 재판받을 무렵 나는 법무장교였다. 우연히 육군본부로 갔던 길에 오랫동안 법무감실에서 근무했던 준위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무슨 재판이 이런 지 몰라요. 법정 옆에서 전두환의 심복이 재판 내용을 듣고 쪽지를 만들어서는 나보고 재판관들에게 전달하라는 거야.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지. 내가 법정 녹음을 해서 나중까지 남겨둘 거야.”

신군부가 재판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얘기였다. 김재규의 재판은 느릿느릿 진행되다가 대법원에 가서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고 사형이 확정됐다. 그 얼마 후 김재규의 사형을 집행 지휘한 선배 법무장교가 이런 말을 했다. “김재규가 마지막 순간 겁을 먹고 그렇게 떠는 걸 봤어. 손에 든 염주가 막 흔들리는 걸 봤어.”

그렇게 한 시대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 대법원장을 했던 분이 자살을 한 것이다.

나는 법조계 원로 김이조 변호사 생존 때 그를 자주 만났다. 아버지 나이 또래의 그는 일제시대 북한에서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해방 후 고시에 합격하고 법관 생활을 오래 한 분이다. 그분은 법조계 역사를 발굴해 여러 권의 책을 낸 독특한 분이다. 재판의 검은 이면을 정확히 기록해 두어야 훗날이라도 정치가 사법을 얼룩지게 하지 못한다는 철학이었다. 지탄 받는 인혁당사건의 담당판사들은 역사에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을 했느냐는 것이다.

김이조 변호사는 내게 대법원장의 자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6.25전쟁 때, 자살한 그 분과 함께 지금의 수도군단인 당시 6관구사령부에서 같이 근무했어요. 그때 식당을 관리하는 본부대장이 전두환이었죠. 김재규 재판 때 신군부에서 대법관을 다 찾아다녔는데 자살한 그분이 주심을 맡도록 의도적으로 배당을 했다고 들었어요. 자살한 대법원장은 아프고 고독해서가 아니라 정권과 타협한 것 때문에 평생 괴로웠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우연히 김재규 재판에 관여했다는 전두환의 심복과 변호사와 의뢰인 관계로 만났다. 그도 늙고 평범한 야인이 되어 있었다. 군 시절 나는 법무장교였고, 그는 보안사령부 장교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군사법원에서 김재규의 재판이 한없이 늘어지는 겁니다. 대법원에 올라가서도 자꾸만 재판이 연기되는 거였죠. 사회에서는 김재규를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영웅 내지 의인화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신군부라고 부르는 저희들은 불안했죠. 그래서 제가 주심 대법관을 찾아가 빨리 김재규의 사형을 확정시켜 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이 후일 그 분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거죠.”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같다.

“처음의 군사재판 때도 옆방에서 쪽지를 보내면서 재판에 관여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맞아요. 그렇게 했어요. 절차에 관여했죠.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죽을 것은 당시 누구나 예상하는 결론이었죠. 문제는 재판절차였어요. 김재규 변호인단은 당시 이름난, 대단한 인물들이었는데 당시 군사법정의 재판관들은 고시나 군 법무관 시험을 통과한 자격자가 아닌 거예요. 날고 뛰는 전문변호사들이 재판절차를 따지고 덤벼드는데 법대에 앉은 그들이 꼼짝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군부라고 불리던 저희가 법원에서 최고의 엘리트 판사를 차출해 절차적인 면을 뒤에서 돕게 한 겁니다. 법 상 민간인 판사가 직접 재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당시의 상황을 아는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은 법이 개정되어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없게 됐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상당 부분 사법부에서 결정되는 현실이다.

요즘의 판사들은 망각된 대법원장의 자살이 던지는 메시지를 알고 있을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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