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사랑으로 귀결되는 지식만이 덕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8장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고린도 교회의 갈등은 내가 좀 잘 안다는 사람들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잘 알았습니다.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막 7:15).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음식 하나 자유롭게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니까 자기는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지식은 무엇일까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가?’, ’얼마나 성경 지식이 많은가?’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는가?’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몸소 체험한 진리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았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 지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사냥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의 앎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히는 사건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지식이 다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앎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귀신을 내어 쫓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해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은 “너는 누구냐?“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벧후 1:6-7)을 더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교만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무식보다 악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앎입니다. 사랑으로 귀결되는 지식만이 덕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