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졸업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열을 말하면 하나도 겨우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를 말해도 열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하진이가 그런 사람이다.

학위를 받고 천안의 모대학교 일본어학과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만났으니, 이 만남도 10년이 훨씬 넘는다. 항상 긍정적이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지금도 행복한 웃음소리와 함께 기억된다. 하루는 서재의 책을 옮길 일이 있어서 어렵게 부탁을 했더니 다음날 건장한 친구 서너명을 데리고 왔다. 싫은 얼굴하지 않고 와준 것만도 고마운데, 목장갑을 준비해온지라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졸업 후에도 직장을 구했다, 결혼을 한다, 석사학위를 받았다면서 부족하고 게으른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소중한 인연이다.

일본어 전공자의 불안한 미래

하진이가 일본어학과 학생이던 그 시절에 비해, ‘일본’은 우리 생활 속에 훨씬 더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한류가 일본을 뒤흔들고 있음과 동시에 우리 젊은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젊은이들의 메카 강남역 주변의 음식점은 온통 일본식 퓨전이다. 일본라멘, 돈가스, 나가사키짬뽕 만이 아니라 카레마저 일본식이다. 길거리에는 붕어빵만이 아니라 다코야키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전공한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긴 한숨을 내쉰다. ‘청년실업’이니 ‘88만원세대’라는 우울한 단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속에서 장기적 경제침체와 잇따른 악재로 인한 일본의 불안한 미래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일본’을 공부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의문을 품으며, 자신이 선택한 전공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면서 달리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할지 고민하는 자도 적지 않다.

전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일본을 우리는 많은 부분 닮아가고자 했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일본과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들을 배우고 또한 그들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추락하는 일본’이라는 인식이 짙어지면서, 일본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어학원의 새벽반에는 <일본어> 책을 든 직장인들보다 다른 외국어의 책을 든 사람들로 붐빈다. 구직란을 뒤져도 일본어 전공자보다는 영어나 중국어 가능자를 더 많이 찾는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하는 학생의 수도 줄어들었다. 일본어 전공자의 설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ATTITUDE

하진이와 점심약속을 했다. 아들 녀석이 난데없이 다이어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하나 달라고 했다. 지난 여름에 법무팀 팀장으로 승진했다고 하니 다이어리 하나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가벼운 생각과, ‘일본’을 공부한 사람으로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일본을 공부하는 후배들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지, 나는 하진이를 통해서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곧 대학생이 될 아들 녀석과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역시 하진이는 하나를 부탁하면 열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아들을 위해서 준비한 게 있다면서, PPT 자료화면 복사한 것과 함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인생에서 나를 바꾼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 하나는 군대이고, 또 하나는 어느 인도인과의 만남이었다. 그 인도 친구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를 들러주고 싶어서 준비했다”는 것이다.

제목은 <A SMALL TRUTH TO MAKE LIFE 100%>. ‘삶을 완벽하게(100%) 만들 수 있는 작은 진실’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ABCD…를 숫자로 바꾸면, 이를테면 A-1 B-2 C-3 D-4 E-5 F-6 G-7 H-8 I-9 J-10 K-11 L-12 M-13 N-14 O-15 P-16 Q-17 R-18 S-19 T-20 U-21 V-22 W-23 X-24 Y-25 Z-26이다. 이렇게 전제하고 나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의 삶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지 계산해보는 일종의 재미다.

정답은


태도, 마음가짐, 자세, 몸가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다. ‘ATTITUDE를 바꾸면 삶이 바뀐다’는 결론이다. 긍정적인 태도, 마음가짐이 결국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 하진이가 준비한 결론이다.

‘사주는 팔자고, 팔자는 태도고, 태도는 운명’이라는 누군가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려운 이 시기에 사회에 진출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현실을 탓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태도와 마음가짐만 있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고…나는 확신했다. 나는 이런 제자가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다.

4 Responses to [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졸업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1. 이부용 February 18, 2012 at 11:54 pm

    교수님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
    떠오르는 몇몇 단어들을 재미로 계산해 보면서 그것이 삶에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려움이 느껴지는 때일수록 긍정적인 마음으로 돌파해 나가는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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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석규 February 22, 2012 at 6:57 pm

    살가운 제자를 두신 것도 다 스승의 품이 따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나저나 수많은 제자들의 길을 어찌 열어줄까 마음이 바쁘시겠습니다. 에둘러도 가고 아래로도 가야지만, 어차피 길어진 목숨, 언젠가 반드시 이루고픈 꿈을 심어주시는 스승이 되시옵소서. 이미 벌써, 그리 하고 계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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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樹靜 沈庚用 February 24, 2012 at 3:03 am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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