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사할린과의 만남①
사할린 징용자들 헌소
지난 11월 23일 사할린 징용 피해자들은 “강제노동임금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 한국정부가 이에 대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교섭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헌법 소원을 제출했다. 청구인은 국내에 거주하는 사할린 영주귀국자 2500여명(현재 사할린 영주귀국자는 3500명)이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할린으로 끌려가 탄광 등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나 그 임금을 우편저금 등의 명목으로 뺏긴 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신문 한 구석에서 ‘사할린 징용자들 정부상대 헌소(憲訴)’라는 길지 않은 글을 보는 순간, 나는 사할린과의 특별한 만남을 기억했다.
1991년, 명자 아키코 쏘냐
영화인들을 위한 작은 모임에서 일본 공사의 통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장호 감독의 영화 ‘명자 아키코 쏘냐’에 관여하게 되었다. 90년대 ‘길소뜸’ ‘티켓’ 등 사회성 있는 작품으로 알려진 송길한 작가의 작품인데, 여기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시나리오 중 ‘일본어’이어야 할 부분을 번역하고 그것을 배역진들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이 일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18억 원(90년대 초 보통 영화제작비는 3억 원 정도)이라는 엄청난 제작비, 사할린 올 로케이션 등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니 나에게 또 다른 세계의 경험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화려한 외출이었다. ‘역사학도’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기만 했던 나는 이것을 계기로 뭔가 조그만 만족감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막연한 허영심이 발동했다는 점도 숨길 수 없다. 김지미, 이영화, 김명곤, 이혜영 등 화려한 은막 스타들과 작업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휴학계를 내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사할린 행 비행기를 탔다. 2007년에야 인천-사할린 직항기가 투입된 모양인데, 그때는 김포에서 유즈노사할린스크까지 가는 비행기가 없었다. 하바로프스크까지 가서 갈아타고 어쩌니 하는 복잡한 항로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혼자서는 어떻게 돌아올 수도 없는 멀고 불투명한 곳을 향하여 영화사에서 마련한 전세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도에서만 확인한 동토의 섬 사할린으로 떠났다. 1991년 소련정변 발생 이틀 후 8월 20일의 일이다. 침울하고 혼란한 시기였다. 전화를 하려면 신청하고 한나절은 기다려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어려서, 몰라서 용감했던 시절이다.
사할린의 한인
한달 예정으로 떠났지만 발전차의 화재 등 잇따른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촬영은 두달 가까이 이어졌다. 우리의 숙소는 시내 중심가의 건물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과 땅뿐이었다. 8~9월임에도 밤에는 추워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래도 촬영장을 따라다니며 도움을 주는 교민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작은 기쁨이었다. 시나리오의 활자 속에서 처음 알게 된 ‘사할린’의 이야기가 이제는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자 아키고 쏘냐’의 이야기는 1940년대부터 시작된다. 암울한 시대 남편을 찾아 일본으로 소련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한 여인의 일대기를 통해서 사할린 억류 동포의 애환을 그린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인들에게 강제 징용 당하여 사할린까지 오게 되고, 해방 후에도 사할린 땅에 버려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할린의 한인들’이다. 이들은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채 짝사랑만 해온 사람들이다. 그 한(恨) 많은 시간과 사연의 억울함을 나는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제 한국정부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들은 반세기 훨씬 전부터 조국을 향해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 북한과 구소련의 너무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보지고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들을 위해서 손을 뻗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