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스티브 잡스와 유니폼

딸아이는 서울의 한 예술중학교를 다니는데, 며칠 전 같은 재단 고등학교의 입시를 치렀다.

물감이니 붓이니 챙긴다고 분주한 가운데,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어야 한다면서 옷장을 뒤지는 바람에 아침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130명 선발에 같은 재단의 중학교 출신 100명이 이 시험을 치르고, 그 중 80~90명 입학한다. 그러니 타학교에서 입학하기란 녹녹치 않은 경쟁이다.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오라고 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타학교 출신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해도 긴장되는 고사장에서 1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같은 교복을 입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타학교 출신의 학생들은 주눅이 들 것이다.

80년대 초의 일이다. 당시 나는 도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가와사키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가을 소풍으로 디즈니랜드를 가게 되었다. 도쿄디즈니랜드가 오픈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들뜬 마음으로 소풍을 준비하는데, 학교로부터 사복을 입고 오라는 말에 더욱 흥분했다.

하얀 블라우스, 까만 치마에 갇혀서 보여줄 수 없었던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였다. 소풍 전날 엄마를 졸라서 청바지를 사러간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게 된 것은 학교의 뜻이 아니라, 디즈니랜드로부터의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꿈의 나라 디즈니랜드를 즐기기 위해서는 교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마 길이를 줄이고 가랑이 부분을 수선해서 나만의 멋을 부리고 싶어 했던 10대들의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역시 디즈니다!”면서 환호했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1000명이나 되는 학생이 같은 옷을 입고 몰려다닌다면, 디즈니랜드 입장에서도 결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교복을 벗어던지고 한껏 자유로워진 친구들은 각자 티켓을 받아들고 삼삼오오 흩어졌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서 움직이는 그런 날이 아니었다.

디즈니랜드에서 잠시 바깥으로도 나갈 수 있었는데, 재입장을 할 수 있는 도장은 종이가 아닌 손등에 콱 찍혔다.

잘은 모르지만 이게 바로 ‘미국식’이라고 생각하고 동경했다.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자유로워진 우리는, 이런 하루를 경험했다.

교복은 아니지만, 최근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잡스만의 유니폼’에 관한 이야기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소개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화제가 되고 있다.

생전 검은색 터틀넥과 리바이스 청바지,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 차림을 고수했는데, 이는 SONY의 유니폼에서 비롯된 것이다.

80년대 일본을 방문한 스티브 잡스는 SONY의 모리타 아키오 회장으로부터 모든 직원이 같은 모양의 유니폼을 입는 이유에 대한 답을 들었다.

모리타 회장은 “전쟁 후 입을 것이 없어서 사원에게 유니폼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SONY의 특징으로 발전했고 서로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감명을 받은 잡스는 SONY 유니폼을 디자인한 미야케 잇세이에게 애플 직원들을 위한 유니폼 제작을 의뢰한다.

그러나 애플 직원들의 강한 거부로 이 계획은 무산된다. 단 잡스는 이것을 계기로 자신만의 유니폼을 입기로 했고, 미야케는 잡스가 유니폼으로 선택한 터틀넥을 수백 장이나 만들었다.

SONY는 창립 60주년이 훨씬 넘었는데, SONY의 사명이 ‘동경통신공업’일 때부터 유니폼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디자인이 달랐고, 하복과 동복이 있었다.

1962년에는 여성 유니폼 디자인을 투표로 정하기로 하고, 모델을 불러서 패션쇼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후 유니폼의 디자인은 몇 번 바뀌었는데, 81년도에 선택된 디자인이 그 유명한 미야세의 디자인이었다.

잡스가 SONY의 유니폼에 관심을 가진 80년대, 일본은 미국도 곧 따라잡는다는 기세로 성장하고 있었고, 미국 역시 부정하지만은 않았다.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젠’이 화제가 되었고, 미서부를 중심으로 스시를 닮은 캘리포니아 롤이 유행했고, 액션 영화에는 닌자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당시 일본은, 영화로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의 ‘빨간불도 모두가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혼자서는 차마 하지 못하는 행동, 비록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도 집단을 이루면 겁 없이 할 수 있는 일본인의 ‘집단주의’를 꼬집는 말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말에 공감했고, 달라져야 한다고 자각했다. 집단 속에서 안주하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새장 문을 열고 날아가고 싶다고,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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