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잉어등용문

<그림=박은정>

등용문

큰놈이 고3이다. 거실 벽에는 시어른께서 손수 걸어주신 십자가가 있고, 베개 속에는 친정어머니가 어느 큰스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부적이 들어있다. 책장 위에는 파란색 바탕에 눈 하나 그려놓은 ‘나자르 본주우(악마의 눈)’를 올려놓았다. 질투의 시선을 반사한다는 터키의 장식품이다. 일본의 작은 사찰에서 사온 ‘학업어수(學業御守)’라고 적힌 ‘오마모리(お守り, 호부)’는 가방에 달았다. 화사함과 풍성함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빨간 모란꽃 조화를 현관에 가득 장식했다. 어릴 적 갖고 놀던 호랑이 인형도 버리지 않았다. 온갖 좋은 기운이 집안 가득 이 아이를 지켜주기 바라는 욕심 많은 어미 맘의 위안이다.

오랜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친구집을 찾았다. 주름이 하나둘 늘어난 친구의 얼굴이 무척 반가웠는데, 순간 나를 매료시킨 건, 그녀의 환한 얼굴이 아니라 거실 한벽을 장식하고 있는 8쪽 병풍이었다. 금박지 위에 수십 마리의 크고 작은 화려한 빛깔 잉어가 헤엄치고 있는 그림인데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보고 있자니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황하의 어변성룡 고사 ‘등용문’

잉어라면 출세의 관문을 뜻하는 ‘등용문’의 아이콘이 아닌가. 황하의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중국 상서성에 이르러 물살이 빠르고 험한 폭포를 이루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지명이 용문(龍門)이다. 그 밑에는 거센 물기둥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 하는 많은 잉어들이 살고 있어서 매년 봄 물이 불어나면 다투어 급류를 향해서 몸을 날려 튀어 오르는 잉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 힘세고 용맹한 잉어가 마침내 물살을 뚫고 오르면, 비늘이 거꾸로 돋고 용으로 변하여 하늘에 오른다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고사가 있다. 등용문은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당나라 때는 과거급제를 의미했고, 지금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창덕궁의 어수문

중국의 등용문 고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잉어를 용종(龍種)으로 보고 입신출세를 상징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은 산세에 의지해 자연 속에 살포시 들여놓은 듯한 궁인데, 가장 사랑을 받는 곳은 역시 부용정이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인공연못 부용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부용지의 축대 동남쪽 모서리에는 물 위로 솟구치는 잉어의 돋을새김이 하나 있다. 용문의 어변성룡 고사는 이곳에서 고스란히 재구성된다.

부용정 맞은편 높은 언덕 위로는 주합루(2층)와 규장각(1층)이 있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돌계단을 올라 어수문(魚水門)을 통과해야 한다. 왕은 어수문으로, 신하는 어수문 옆 작은 문으로 출입한다. 이른바 어수문은 왕과 신하의 만남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용지의 물고기가 훌륭한 임금을 만나 용이 되고 하늘로 오르는 등용문인 셈이다. 영화당 앞마당에서 과거시험을 치른 인재들은 어수문을 통해서, 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즐기는 학문과 예술의 전당인 주합루와 규장각으로 오를 수 있다.

일본의 고이노보리

5월5일 일본 하늘에는 천이나 종이로 만든 잉어 모형을 장대에 단 ‘고이노보리(鯉のぼり)’가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이 날을 ‘단고노셋쿠(端午の絶句)’라고 한다. 중국의 세시풍속 단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음력 5월은 역병이 발생하기 쉬운 달이라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여러 풍습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창포나 쑥을 몸에 지니거나 지붕에 얹는 것이었다. ‘창포’를 일본어로 ‘쇼부(しょうぶ, 菖蒲)’라고 하는데, 이는 ‘승부(勝負)’, ‘상무(尙武, 무예숭상)’와 같은 발음이다. 그래서 무사 집안의 남자아이들이 창포로 만든 투구 같은 것을 쓰고 놀면서 남자아이들을 위한 축제의 날로 자리 잡았다.

에도시대 무사의 집에서는 아들의 입신출세를 기원하면서 등용문 고사를 본 따 ‘고이노보리’를 지붕보다 높은 곳에 달았다. 일본의 음력 5월은 때마침 장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어우러진 ‘고이노보리’는 인생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씩씩하게 성장해서 등용문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후 신분의 차가 없어지면서 서민들 사이에서도 유행되었고, 남자아이의 축제로 이어졌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새로운 근대국가를 출범시키고 음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력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단고노셋쿠’의 행사를 마치 어린이날의 행사인양 하고 있다.

친구는 병풍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북경에서 산 벽지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남은 벽지를 나누어주었다. 나는 당장 아담한 2쪽 병풍을 만들어 거실의 한모서리에 세웠다. 잉어의 힘찬 기상의 기운으로 고난을 뚫고 승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더했다.

밥을 먹다 뒤늦게 발견한 우리 아들 낄낄낄 웃으면서 왈 “엄마, 아들 하나 더 낳으려고….” 이놈의 자식 어미 맘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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