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일본의 왕, 천황①
천황 주최의 원유회
천황이 주최하는 원유회(園遊會)가 지난 4월19일 일본왕실의 정원인 아카사카 어원(御苑)에 서 열렸다. 봄, 가을 2번 열리는데 봄의 원유회는 벚꽃을 본다고 ‘관앵회(觀櫻會)’, 가을의 원유회는 ‘관국회(觀菊會)’라고 한다. 1880년 메이지 시대에 황족, 관료, 외국대사들을 초빙해서 개최한 것이 그 시작이다. 2000여 명 각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초대를 받고, 천황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2010년에는 아사다 마오가 초대받았다. “연습을 많이 했지요. 좋은 성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라는 천황의 말에 긴장한 마오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연발하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2004년도 가을 원유회에서는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요네나가 구니오(米長邦雄) 위원이 경직된 자세로 대뜸 “학교에서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기미가요를 제창하게 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라고 말하자 천황은 “강제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는 답변을 했다. 당시 이것은 일본 우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번 원유회에서는 대만의 주일대사에 상당하는 대만 대표(馮寄台 台北駐日??文化代表?代表)가 초대를 받았다. 일본과 대만이 1972년 단교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직후 대만은 모금운동을 하고 약 200억 엔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천황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외교상의 문제를 천황이라는 특별한 존재를 통해 공식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액션을 취한 셈이다. 이것이 지금 일본 천황의 역할이다.
천황이 하는 일
2006년 만화 <궁>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됐다. 1945년 입헌군주국을 채택하여 현재 황제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나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설정이라 당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21세기 대한민국에 왕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살겠구나’ 등등 많은 생각을 했다. 이후 왕이 존재한다는 가상소재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안방극장을 달구고 있다.
21세기 한국에서는 가상이지만, 지구상에는 왕이 존재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영국을 비롯해 모나코, 벨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이 중에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왕정제(王政制)를 실시하는 나라도 있지만 일본처럼 실제로는 총리가 나라를 다스리는 내각제를 실시하는 나라도 있다.
일본은 ‘상징(象徵) 천황제’이다. 1946년 11월3일 공포된 일본국헌법에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 전체의 의사에 기인한다”고 기술돼 있다. 즉 천황은 국정에 관여할 수 없다. 천황의 행위는 형식적 혹은?의식적이다.
천황이 하는 일은 크게 ‘제례’와 ‘공무’다. 공무는 ‘국사행위’와 ‘공적행위’로 분류된다. 국사는 내각총리대신 임명, 국회소집, 참의원 해산 등 국가와 정치에 관련된 일이다. 상주(上奏) 서류가 연간 1100~1200건, 궁내청 관련서류가 1000건이라니 그 양은 엄청나다. 그렇다고 천황에게 어떤 결정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례적 행위에 불과하다. 공적행위는 외국방문, 지방방문, 내외귀빈 접대, 원유회 등이 해당한다. 이른바 천황이 공적인 입장에서 행하는 일들이다.
제례는 천황이 여러 신들과 역대 천황을 모시고 국가와 국민의 번영을 기원하는 일이다. 현 헌법상 법적으로 천황의 가장 중요한 일은 국사행위이다. 궁중제례에 대한 명문의 규정은 없다. 그러나 21세기의 천황에게도 이 일은 무시할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궁중제례는 천황이 직접 주재하는 친제(親祭, 大祭)와 소제(小祭)로 나뉜다. 친제는 천황이 직접 신령에게 기원하는 글(告文)을 읽는 것으로, 한해를 시작하는 ‘원시제(元始祭)’ 추수제에 해당하는 ‘신상제(新嘗祭)’ 선대 천황의 제사인 ‘선제제(先帝祭) 등이 해당한다. 소제는 친제가 아닌 그 외의 제사다. 장전장(掌典長)이 주관하고 천황은 배례만 한다. 이런 크고 작은 궁중제례가 연 20개 정도 된다.
일본천황은 일본건국신화의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가미의 자손이다.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이 그 직계손이라고 하고, 지금의 천황인 아키히토(明仁)는 125대 천황이다. 그러니 천황은 신의 자손이고, 믿거나 말거나 2600여년이나 이어졌다는 말이다. 신화가 역사고 역사가 신화인 가운데 일본의 왕 천황은 샤머니즘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호노니니기야가 지상으로 내려올 때 가져왔다는 삼종신기(三種神器, 거울, 신검, 옥구슬)는 황위의 상징으로 지금도 간직되고 있다. 패전 후 쇼와천황이 ‘인간선언’을 했지만 1989년 1월7일 오후 6시33분 그가 사망하자, 3시간 반 후 지금의 천황에게 삼종신기를 계승하는 의식(?璽等承繼の儀)이 바로 거행됐다. 밤 10시 늦은 시간이지만 이것으로 비로소 아키히토가 125대 천황이 되는 것인지라 다음날로 미룰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재미나지 않는가. 즉위식은 다음해 11월에 거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