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파랗다. 더위도 태풍도 지나고 가을이 한가로운 주말이다. 나는 욕조에 물을 가득 담고 세제를 풀었다. 이방 저방에서 여름이불을 가져다 굵은 다리로 꾹꾹 밟으니 거품이 하얗게 일고 간혹 비눗방울이 만들어졌다 터진다.
이맘때면 외갓집 그 넓은 마당에는 눈부시도록 하얀 이불 홑청이 휘날렸다. 그 사이 사이를 마치 미궁을 헤매는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빨랫감 더럽힌다고 혼나기도 했지만 그 소리마저 황홀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해가 빠지고 빨래를 걷는 식모언니 등에 업혀서 빨랫감 속 가득 밴 하얀 햇살의 냄새를 맡으면 그것 역시 좋았다. 대청마루에서는 할머니의 다듬질 소리가 들리고, 여자들이 둘러앉아 이불 홑청을 꿰맨다. 이런 날은 시집간 이모도 와서 늦은 밤까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파트 베란다에 알뜰하게 널었다. 그래도 모자라 볕이 닿는 자리를 찾아가며 거실 한쪽으로도 빨랫대를 폈다. 이불마다 파란 하늘의 햇살을 담고 싶어 볕이 닿는 자리가 움직이면 빨랫대를 따라 옮겼다. 뽀오얀 빨랫감 냄새에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언젠가는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다. 낮에는 해를 쬐고 밤에는 해를 듬뿍 담은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살 것이다. 청소하고 빨래는 내가 할 터이니 밥 잘하는 며느리가 밥만 해주면 좋겠다 하니, 우리 아들 걱정말란다. 우리 딸 이의 없다는 눈으로 째려보거나 말거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캐나다에서 마당 있는 집 한 채를 얻어서 살아본 적이 있다. 잔디가 곱게 깔리고 조각품도 몇 점 있는 멋진 마당이었다. 여름이라 햇살이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그래도 나는 이 집에서 한 번도 빨래를 널어본 적이 없다. 항상 건조기를 이용했다. 주변의 어떤 집에서도 빨래가 널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마당은 열려 있었고, 그림처럼 예쁜 마을에 빨래는 어울리지 않았다. 용기 내어 빨래를 널어본다면 아마도 볼썽사납다고 옆집에서 한마디 할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지금은 건조기를 이용하는 집이 적지 않다. 그래도 대개는 맑은 날 세탁기를 돌리고 햇볕을 찾아 빨래를 말린다.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면 때가 쏙 빠진 새하얀 세탁물을 빨랫대에 차곡차곡 널어서 태양에게 맡기는 그 뿌듯함을 알 것이다.
일본 주택가를 거닐다보면 빨랫대에 널린 옷가지를 쉽게 볼 수 있다. 이것만이 아니라 두꺼운 솜이불이 햇빛 찾아 널려있는 것 역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별한 날이라서가 아니다. 일본은 습기가 많은 나라인지라 매일 아침 자고난 이불을 햇볕에 말리는 게 일이다. 그러니 집집마다 이불을 너는 굵은 봉의 빨랫대가 있고, 이불먼지를 털기 위한 막대기도 하나쯤 가지고 있다. 행여나 이불이 떨어지거나 날아갈까 이불용 커다란 빨래집게도 있다.
다다미방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는 장점이 있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이지 우리의 온돌방처럼 확실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기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요는 두껍다. 덮는 이불보다 더 두껍다. 두겹, 세겹 깔고 자기도 한다. 뜨거운 물에 담가 데워진 몸으로 폭신폭신한 이불 속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 역시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낮에는 이불을 말려야 한다. 다습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뽀송뽀송한 이불은 최고의 사치일 것이다. 이것만이겠는가. 이불 속 진드기를 탁탁 털어내야 하고, 햇볕에 소독도 해야 한다. 이것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이불용 드라이기’를 이용한다. 청소기처럼 생긴 기계의 기다란 코에서 뜨거운 바람을 내뿜는다. 이것을 이불 속에 넣어서 건조시키는 거다.?
여름을 정리하고 가을을 준비하는 여자들의 손이 바쁘다. 시집올 때 해온 두꺼운 이불들을 꺼내고 가을 햇살 가득 담기 위해서 햇빛을 찾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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