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짧음의 미학
광화문 글판
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을, 세종로를 지나다 교보빌딩에 걸린 커다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이 짧은 글귀가 내걸음을 잡았다. 오후 내내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무 자 남짓한 글귀가 나를 가을에 흠뻑 빠지게 했다. 누가 이런 글을? 누가 이런 글을 만들어 가슴 깊은 곳을 꼭 집는 것일까? 궁금해서 뒤졌더니 안도현 시인의 <가을엽서> 마지막 구절이었다.
나는 이 시를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큰 아이 학교에 이 분이 오셔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느릿하고 나직한 목소리의 시인은 많은 시를 낭독하셨고 그 이후 나는 이 분의 시를 찾아서 흥얼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낮은 곳으로/자꾸 내려 앉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를 나는 알고 있었다. 11줄에 걸친 활자를 보았을 때 분명 나는 그 뜻을 음미했고 가슴에 살짝 담았다. 그런데 광화문에서 이 시의 한 구절을 만나자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더 크게, 더 강하게, 더 요란하게 내 마음을 흔드는 광화문 글판의 글은 <가을엽서>와는 다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짧음’ 때문일 것이다. 큰 것보다 작은 것이,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이 더 큰 감동을 전하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여백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이쿠
일본에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일명 ‘하이쿠(俳句)라는 것이 있다. 5·7·5의 3구 17음에 마음을 담아야 하니 난해하다. 난해하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세상은 무궁하다.
15세기 말 중세 일본에서는 와카(和歌)의 음율을 5?7?5와 7?7로 나누어서 여러 사람이 번갈아 읊는 장시(長詩)가 유행했다. 긴 것으로는 100구까지도 이어졌다. 이것을 렌가(連歌)라고 하는데. 이중 서민생활을 주제로 익살과 해학을 담은 렌가를 특별히 하이카이-렌가(俳諧連歌, 줄여서 하이카이)라 한다.
17세기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하이카이의 첫 번째 구인 홋쿠(發句, 5?7?5의 17자)를 중요시하면서 단독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글, 홋쿠를 수없이 읊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유행했으며 또한 예술성을 높였다. 홋쿠만을 모은 홋쿠집(發句集)이 만들어지고, 에도 중기 이후에는 홋쿠의 비중이 커졌다. 이것이 훗날 하이쿠(俳句)의 시작이다.
‘하이쿠’는 원래 존재했던 용어가 아니다. 메이지시대의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가 에도 말기의 렌가가 진부하다는 이유로 문예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홋쿠만 독립시켜서 ‘하이쿠’라 명명했다. 그는 근대문예로서 개인의 창작성을 중시했다. 이후 해학적이고 응축된 어휘로 세상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하이쿠는 일본 시가문학의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하이쿠는 5·7·5 운율의 정형시이어야 하고, 계절을 상징하는 단어 계어(季語)를 담아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지금은 50여 나라에서 이를 즐기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교과서에 담고 있는 나라도 있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나라도 있다. 뉴욕타임즈에서는 하이쿠 공모도 한단다.
바쇼의 하이쿠
바쇼의 하이쿠는 우크라이나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이 짧은 글 속의 여운을 언어도 문화도 얼굴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려나. 사무라이의 길을 접고 방랑시인으로 살아온 그를 어찌 이해하려나. 짧은 글 속에 담긴 짜릿한 충격은, 그리고 긴 이야기는 모두 각자의 몫일 것이니 내가 염려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설레고 또 설레는가 보다. 류시화의 책 제목처럼 하이쿠는 ‘한줄도 너무 길다.’
봄의 첫날/나는 줄곧 가을의/끝을 생각한다
너무 울어서/텅 비어버렸구나/매미의 허물
가을이 깊었는데/이 애벌레는/아직도 나비가 되지 못했구나
잿불도 사그라든다/눈물/떨어지는 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