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답변은 ‘일본사람’처럼

성적, 이의신청

기말고사를 치르고 성적 처리를 하면 바로 여름방학이다. 방학은 학생만 설레는 게 아니다. 선생도 설렌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의 관문이 있다. 학생들 성적을 공개하면 몇몇 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적게는 1~2명 많게는 4~5명, 문자나 메일로 연락하는데, 결코 반가운 건 아니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메일 첫줄에 ‘이의신청’이라고 당돌하게 접근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발 부탁입니다’라고 읍소하는 이도 있다. 하나 같이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목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고 협박 아닌 협박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잘못 채점했을 수 있으니 이의신청하는 이의 시험지를 보고 또 본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다. 그리고 다시 확인해도 “학생의 점수는 ○○%에 속하니 점수에 착오가 없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지난 학기에는 수강생 12명의 강좌가 있었다. 30%가 A인지라 열심히 공부하는 4명의 학생을 눈여겨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의 산수 실력은 여기서도 문제가 되었다. 12명의 30%는 4명이 아니라 3명이다. 시험지를 보고 또 보고, 제출한 리포트를 보고 또 보고 모진 마음으로 A와 B를 나누었다. 아마도 B를 받은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올 것이고 나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문화 수업은 40명이나 된다. 모든 학생에게 발표를 시켰다. ppt를 작성하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모두 열심히 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역시 30%만 A다.

아니나 다를까, 문화 수업을 수강한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석도 하지 않았고 발표도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C냐는 거다. 역시 발표한 ppt 자료를 확인하고 중간고사·기말고사 시험지를 찾아서 잘못 채점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결석도 지각도 없는 착실한 학생이지만 시험점수가 형평 없다. 100점 만점에 50점, 60점이면 본인도 대강 알 터인데 어찌 그리도 당당하게 ‘이의신청’을 했을까 씁쓸했다.

‘뻔뻔한 놈! 어떻게 답을 해줄까.’ 한참 생각했다. 왜 그리도 공부를 안 했냐고 혼을 내줄까, 아니면 답변 자체를 거부할까, 혼자서 열을 올렸다 내렸다 다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이런 경험은 나만이 아니다.

“학생들 성적 공개 후, 학생으로부터 메일이 오면 깜짝 놀라고 긴장한다”는 동료의 말에 동질감 정도가 아니라 안도감마저 느낀다. 어떻게 대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 지금의 학생은 우리 때와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 우리 때야 감히 ‘이의신청’ 같은 거 생각이나 했었나.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지.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선배 한분이 “일본사람처럼 하면 돼”라고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신다. 순간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모두들 대강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모인 멤버 중에는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오랫동안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도 있다. 하여튼 모두가 ‘일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 ‘일본사람처럼~’이라는 말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일본사람’의 이미지를 꺼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답을 찾았다.

일본사람?

일본사람이라고 하면 ‘친절하다’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원칙주의’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물론 상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이겠지만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일본을 방문하고 길이라도 한번 헤맨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친절함에 감탄한다. 상냥하고 부드럽게 끝까지 말을 듣고 도움을 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선진 국민’이니 어쩌니 하는 말까지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긋나긋하게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끝까지 웃는 얼굴로 대꾸하고 때로는 맞장구도 친다. 그리고 결정적 타이밍에서, 역시 나긋나긋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이건 100% 거절이다.

처음부터 거절할 것이지 실컷 이야기하게 하고 결국은 바늘구멍 하나 내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꼴이 되면서, 비로소 일본인의 ‘혼네(本音, 본심)’ ‘다테마에(立て前, 표면상 대응)’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본심, 표면상 대응 그리고 배려

우리는 그들의 ‘혼네’ ‘다테마에’를 나쁘게만 생각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놈들이야” “역시 믿을 수 없어” 이렇게 치부한다. 그런데 이건 ‘기쿠바리(?配り)’라는 단어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기쿠바리=배려’란 상대가 어려워하지 않도록 여로 모로 마음을 두루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속마음까지 헤아리고 상대가 어려워하거나 쑥스러워하거나 어색하지 않도록 그의 입장을 살피고 그의 말을 끝까지 잘 들어준다. 일본 친구들이 이야기 중간중간에 “에~” “정~말”이라면서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는 것도 열심히 들어주고 있으니 겸연쩍어 말라는 하나의 표현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여기까지다. 말을 들어준다는 거와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거는 별개다. 말을 하는 그 시간에 대한 배려는 철저하게 하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해결에 대해서는 어떤 배려도 용납되지 않는다.

여하튼 답은 나왔다.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진작 열심히 할 것이지 지금 와서 무슨 점수타령이냐”면서 큰소리로 혼을 내고 잠자리에 들 때면 마음이 아파서,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C를 C+라도 고칠 수 없을까 궁리하면서 컴퓨터 전원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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