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든든한 ‘내편’
우리집 사람들
옆집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나 보다. 구두소리를 듣고 강아지가 튀어나와 캉캉 짖으면서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엄마야~”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그 소리를 들은 우리 할머니, 맨발에 주걱을 들고 강아지 뒤를 쫓았다. 강아지 주인 역시 뒤를 쫓으면서 “안 물어요”라고 외친다. 출근시간, 아파트의 긴 복도에서는 이렇게 재미난 한 컷이 그려졌다. 내가 처녀 때 일이니 참 오래된 일인데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이런 할머니가 계셔서 든든했다. 설사 그게 한 주먹 크기의 강아지가 아니라 산만한 곰이라고 한들, 호랑이라고 한들 할머니는 주걱을 들고 뛰어오셨을 것이다.
이런 믿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작은 가슴에 존재했다. 삼촌 저금통의 동전을 몰래 꺼내서 혼날 때도, 이모의 화장품으로 얼굴을 낮도깨비로 만들었을 때도 할머니는 내편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내편이었다. 그리고 행여나 누군가에게 맞지는 않는지 나쁜 소리는 듣지 않는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울지는 않는지…. 커다란 치마폭으로 항상 감싸고 계셨다. 이건 나에게 큰 힘이었다. 일본에서 사춘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주눅 들지 않고 언죽번죽 잘 살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집안내력일까. 우리 아들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지면 땅을 때리면서 “때찌 때찌 나쁜 놈”이라고 혼을 내고, 식탁 모서리에 부딪치면 역시 모서리를 나무라면서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달랬다. 이거야 대한민국 엄마라면 누구나?한번쯤은 해본 일일 것이다.
이제는 키가 180cm이 넘는 아들인데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뭔가에 부딪쳐 아파하고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내 아들부터 챙긴다. 자정이 다 되어서 축 처진 몸으로 돌아오는 수험생 아들에게 “나중에 엄마가 늙어서 작아지고 네가 더 커지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엄마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 뭐든 말해”라고 큰소리를 친다. 아들인들 왜 모르겠는가. 이미 저보다 작아서 내려다봐야 하는 엄마의 허풍을. 그래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씩~ 웃는 모습에 다독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냥 아이의 말을 존중해 주는 것밖에. 나는 아들이 싫다고 하면 나도 싫다고 하고, 아들이 나쁘다고 하면 그것이 설사 하늘같은 선생님이라도, 대통령이라도 나쁘다고 한다. ‘헐~’ ‘멘붕’ ‘즐~’ 같은 단어를 섞어가면서 같이 흉도 보고 욕도 한다. 교육적으로 나쁜 일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는 그냥 할머니 치마폭의 그 따뜻함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귀한 내 아들 남들 눈에 털끝 하나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매를 들 때도 있고 내 분에 못 이겨 주먹으로 쥐어박을 때도 있다. 그래도 어디서 말 못할 억울한 일은 겪지 않는지. 그런 일이 있다면 호랑이인들 무서우랴 범인들 무서우랴 내 목숨 다해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비록 허술하기는 하지만 살아가면서 이런 용감하고 무식한 내편이 없다면 얼마나 서럽겠는가.
정채봉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을 아는가. 아주 오래 전 ‘하늘에 가 계신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는 구절에 나도 따라 엉엉 운 적이 있다. 사람이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참 약하고 여린 존재이다. 저렇게 큰 남자도 엄마에게 일러바칠 억울한 일 하나 둘 품고 사니 말이다.
2012런던올림픽 동메달 박탈
살다보면 분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안타까운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분개했다. 수영 박태환의 자유형 400m 예선 실격 판정, 유도 조준호의 판정 번복, 펜싱 신아람의 ‘1초 오심’ 등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 앞에서 전국민은 분노했고 선수들의 아픔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몰라 했다. 그들을 대신해서 이 억울함을 풀고자 발 빠른 이의신청을 하고 현장에서 항의하는 모습에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데 또 다시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독도 세리머니 논란으로 축구 박종우 선수는 메달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귀신의 장난도 아니고, 순간의 작은 행동이 이렇게 크게 불거질 줄이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한 일본정부의 민감한 반응이 대두되는 가운데 한골도 허락지 않고 2대0으로 이긴 우리 선수들이 아닌가. 하얗게 밝아오는 새벽 유쾌한 승리에 온 국민은 행복한 얼굴로 하루를 맞이했다. 시합이 끝나고도 한참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일본선수들의 모습은 그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도쿄 길거리의 한 시민은 “실력에서 진 것 같아서 정말 분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우리는 실력으로 이겼다.
IOC는 박종우 선수에게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른다. ‘스포츠는 정치와는 별개’라는 이유로 문제가 된 사건이지만, 사실 올림픽은 정치와 별개가 아니라서 불거진 일이다. 대통령의 일왕사과 요구, 위안부 문제 등 한일 대립 감정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외교의 힘이 분명 좌우할 것이다. 어떤 결과이건 나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당신 편”이라고. “당신의 억울한 마음을 꼭 품어줄 것”이라고.
‘든든한 내편’은 왜 항상 지금 내 곁에 없을 때 더 그리워지는 걸까요? 하지만 또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할 때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거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멀리서도 항상 ‘내편’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