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안철수와 ‘가라샤’

안철수 대선후보가 사퇴했다고…?!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자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와 같은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공부를 할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커리어우먼으로 남을 것인가’ 인생의 마디마디 무거운 선택의 시간이 있었다. ‘이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저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이런 황홀한 선택 앞에서 고민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없었고, ‘가락지를 금으로 할 것인가 백금으로 할 것인가’ 이 정도의 사치스러운 고민은 했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결정이 필연이었고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별 탈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1년 후, 2년 후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라는 무거운 과제 앞에서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선택할 것인가 저것을 선택할 것인가, 비슷한 두 개를 비교하면서 고민하는 일은 그래도 즐거운 일이다. 점괘에 의지하기도 하고, 잔뜩 술을 마시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시간의 흐름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리고 운명이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지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해야 할 것인가.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떨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선택을 해야 하는 현 시점과 미래를 보아야 하는데, 지나간 시간에 매여서 그 아쉬움 때문에 엉뚱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경솔하지 않게,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게 기도하지만 나는 유하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다.

안철수 대선후보가 사퇴했단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하고 또 했을까. 어찌되었건 그가 선택한 일이다. 나는 그의 선택을 보면서 생뚱맞게도 가라샤의 사세구(辭世句)를 떠올렸다.

가라샤의 사세구

져야할 때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 되고/ 사람도 사람이 된다
散りぬべき時知りてこそ世の中の花も花なれ人も人なれ

이것은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에 걸친 전국난세, 천하통일을 꿈꾸는 자들의 무대 뒤에서 자신의 삶을 그려나간 호소가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 1563~1600)의 사세구이다.

전국시대의 절세미인 가라샤(세례명, 본명은 다마)는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딸로서, 157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명으로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의 처가 된다. 16살 때의 일이다. 노부나가는 가신들의 자녀를 강제로 결혼시키고 상호 감시하게 하는 것으로 모반을 막고자 했다. 아케치는 가라샤만이 아니라 다른 딸들도 모두 노부나가의 명에 따라 시집을 보냈다고 하니, 노부나가의 명에 절대복종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같은 나이의 처를 맞이한 다다오키는 너무나 사랑하여 가라샤를 꼭꼭 숨겨두고 외출도 제한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1582년 아버지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배반하고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미츠히데를 공격하는데, 다다오키는 히데요시의 편을 들고 승리를 거둔다. 이로서 미츠히데의 딸 가라샤는 역신의 딸로서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유폐되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아무리 가라샤를 사랑한다고 해도 명목상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모반을 일으켜 주군을 죽게 했고, 그 아버지를 토벌한 자는 바로 남편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이런 일이 허다했다. 이제 가라샤는 돌아갈 친정도 없고, 그렇다고 남편 앞에서 당당할 수도 없다. 이게 전국시대 여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때 가라샤를 모시던 시녀 중 가톨릭 신자가 있어서 가라샤는 가톨릭을 알게 된다. 히데요시가 그리스토교 선교를 금하고 신부추방령을 내리는 시기임에도, 가라샤는 자택에서 은밀하게 세례를 받고 절망과 괴로움을 신앙으로 구원받고자 했다. 세례를 받은 가라샤는 겸허하고 온화하고 밝은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히데요시 가신의 우두머리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는 새로운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와의 전쟁을 앞두고 배신을 막기 위해서 장군들의 부인을 오사카 성에 들여보내도록 명했다. 그런데 가라샤의 남편 다다오키는 이미 이에야스 편에 설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가라샤는 자신이 인질로 잡히면 남편에게 폐가 될까 죽음을 결심한다. 다만 자살을 금한 그리스토교의 가르침이 있어서, 가신에게 자신의 가슴을 찌르게 해서 죽음을 맞이한다. 38세의 생을 마감하면서 읊은 시구가 바로 ‘져야 할 때를 알아야~’이다.

1992년 일본신당을 창당하고 55년 체제(자민당-사회당 양당체제) 이후 최초의 비자민당 총리가 된 호소가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국민복지세 파문과 리크루트스캔들 연루의혹을 받으면서 총리를 사임할 때 이 시구를 인용했다. 그는 다름 아닌 가라샤의 자손이란다. 그는 지금 정계를 은퇴하고 도예가로서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모반하고 역사에 남을 정도의 집안의 딸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니다. 파란만장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항상 승자의 집단에서 활약하는 유능한 남자의 아내도 아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신앙에 의지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도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의 때를 아는 이가 되고 싶다. 그것이 어떤 선택이고 어느 때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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