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글로벌 ‘스파이더맨’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집 앞 버스정류장에?<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커다란 영화 광고판이 있다. 건물벽을 타고 오르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어두운 밤에도 불빛으로 환하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쫄쫄이 천이 많이 좋아졌는데? 10년 전보다”라는 아들의 말에 크게 웃었다.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스파이더맨>을 보러 간 날이. 당시 휴가차 일본에 가 있었던 나는 세 딸을 둔 고교 동창생 요코 네와 같이 영화관을 찾았다. 고만고만한 놈들 다섯을 데리고 영화관을 간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 대사에 일본어 자막의 영화를 보러 가면서 아들에게 “다 알아들을 수 있겠지”라고 말했고 그는 뻔뻔하게도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엄마한테 있어서 큰 아이는 항상 크게 보이는 법이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 다 컸다고 생각했었고, 어학원에서 1년 남짓 배운 영어로 영어 대사를 완벽하게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다.

마블코믹스(Marvel Comics)의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은 마블코믹스(Marvel Comics, 미국 만화책 출판사)의 만화 캐릭터를 영화화한 것인데 배트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영웅과는 달리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가난한 고등학생이 주인공인지라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치고는 잔잔한 감동도 함께 한다. 그러니 아줌마들 마음에도 여운을 남기는 그런 영화였다. 신나게 보고 나서 나는 아들에게 “어떤 대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니?” 지금 생각하니 그 어린 놈한테 무엇을 바랐는지 웃길 따름이지만, 당시는 진지하게 그렇게 물었다.“남들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 만큼 더 많은 의무가 있다” 뭐 이런 멋진 대사를 기대하면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주 거만한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해서 손바닥을 쫙 내밀더니 “얍”하고 외쳤다. 스파이더맨이 손에서 줄을 뿜어내는 그 포즈다. 그리고 소파에서 책상으로 그리고 다시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멋쩍은 웃음을 보이면서 요코의 큰 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일본어 자막을 통해서 영화를 더 잘 이해했을 것이고 우리아이보다 2살이나 더 많으니…, 요코도 내심 우리아이와는 차원이 다른 답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 역시 “얍”하고 더 크게 뛰어 책장 위에까지 올라갔다. 밑의 놈들은 말할 것도 없다. 언니 오빠 따라 다들 난리다.

영어가 중요하다고…?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우리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얼마나 더 많이 영어공부를 시켜야 할지 궁리했다.

‘글로벌 글로벌’하면서 영어교육이 강조된 것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너나할 것 없이 영어유치원을 선호했고, 그 어린 것들을 매몰차게 조기유학을 보냈다. 오직 자식의 영어교육 때문에 ‘기러기아빠’를 만들었고, 원정출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짓도 겁 없이 감행했다. 나는 이 어느 것 하나 따라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을 내심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는 말이 맞는 말이라면 나는 ‘졌다’. 내집마련을 꿈꾸는 새댁에게 영어유치원은 너무 비쌌고, 예쁜 새끼들 한시도 내 눈에서 떼고 키운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7시면 시계처럼 귀가하는 신랑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날 용기도 없었다. 이래저래 우리아이들은 엄마품에서 아주 평범하게 자랐다. 그러니 대학입시 ‘글로벌 전형’에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한다.

요코 네 세 딸도 우리 아이들이랑 다를 바 없이 자랐다. 치마를 팔랑이면서 뛰어다닌 큰 애는 벌써 대학생이고 둘째는 우리 아들과 같은 나이니 고3 수험생이다. 다른 게 있다면 요코는 조기유학, 기러기아빠, 원정출산 이런 단어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모르는 단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선택하지 않았을 뿐 선택할 수도 있었던 길에 대해서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아이의 영어성적을 볼 때마다…. 일본도 영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가정의 아줌마가 기러기아빠니 원정출산을 생각하는 그런 나라는 아니다. 적어도 내 친구들은.

진정한 글로벌

마침 기말고사도 끝나고 간만에 가족이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보러갔다. “얍”하고 손바닥을 내밀던 우리집 아들이 이제는 영화 속 주인공 피터 파커의 나이가 되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떤 대사가 가장 핵심이었다고 생각하니?” 뭘 기대하랴, 나를 보고 씩~ 웃더니 “약속은 깨야 제 맛”이란다. 여자친구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와 헤어질 생각을 했었지만 그러지는 못하겠다는 뜻으로 하는 피터의 마지막 대사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주인공 삼촌의 대사가 이 영화의 주제임을 모를 리 없다. 어쩌면 10년 전에도 이 아이는 이렇게 나를 놀렸는지도 모르겠다. 요코 네 아이들과 함께.

글로벌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 어디에서든 같은 시간대에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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