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버거운 사람들 사이에서 의연함과 여유 가지려면…
창세기 26장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6:22)
요즘에야 맑은 물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고대 근동에서 물은 좋은 기름 이상의 값어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우물의 가치는 오늘날 유전의 가치와 견주어도 될 만큼 우물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들을 메웁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어떻게든 그와 화친을 맺으려 했던 아비멜렉이었습니다. 힘 있고 영향력 있던 아브라함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죽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소중한 업적들을 흙으로 덮어버립니다.
많은 관계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득 볼 게 없어지고 단물이 빠지면 마음이 돌아섭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치이며 살아가다 보니, ‘인간 알레르기’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계산적 관계에 지쳐서 사람으로부터 환멸을 느끼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19절 이하에는 치여 살았지만 매여 살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버거운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그런 의연함과 여유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사람들은 힘과 손익의 논리로 그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습니다. 우물을 팔 때마다 우물의 소유권을 가로챕니다. 이삭이 우물을 소유할 수 없게 만들면 그들이 그 땅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주도권을 쥘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애써 판 우물을 그들이 달라는 대로 줘버립니다. 이삭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입지를 점할 것인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우물의 소유권도, 인간 관계의 주도권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빼앗고 또 빼앗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빼앗기고 빼앗겨도 넉넉한 인생이 있습니다. 소유가 많다고 넉넉할까요? 많은 소유를 관리하기 위해 많은 수고와 복잡한 계산이 필요할 뿐입니다. 넉넉함은 소유 기반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기반의 소유에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애착 베개와 인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베개와 인형이 있으면 아이는 편안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베개와 인형을 버리지 못하면 집착입니다. 이삭은 베개와 인형을 버리듯 우물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애착이 잘 형성된 사람의 넉넉함(르호봇)입니다. 충실하지만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여유와 자유는 창조주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