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호위무사는 변호사 아닐까”

배보윤 김홍일 윤갑근 변호사(왼쪽부터)

법과의 인연으로 나는 역사적 재판을 여러 번 목격했다. 법정에 올려진 정치나 역사에서 변호사들의 역할을 특별히 살피기도 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 때였다. 변호사 중의 한 명이 주심재판관과 법리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변호사는 대학시절부터 천재로 알려지고 법관 경력도 주심재판관보다 많았다. 그래서인지 재판관을 향해 변론을 하는 그의 모습은 교수가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뉴스 화면 속에서 자존심이 상한 헌법재판관의 반항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 한 법조원로는 이런 말을 했다.
“그 변호사가 오버를 한 바람에 6대2로 헌법재판관의 의견이 갈라질 재판이 8대0으로 되어 버렸어. 그 변론 태도 때문에 대통령이 파면됐어.”

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시 군중의 감정이 선을 넘어 강력한 야수로 변해 있었다. 허약한 법치가 무너져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박근혜의 파면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변호사가 할 말을 다하고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도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독재정권에서 인권변호사들이 그렇게 했다. 재판부를 보고 하는 변론이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향해 하는 변론이고 남겨두는 기록이었다. 재판이 절대가 아니고 선고가 끝이 아니었다.

내가 20대 법무장교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의 재판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사형이라는 정해진 결론이 이미 나 있고 재판은 죽음으로 향하는 장례의식 절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재규는 자신에게 붙은 변호사들을 모두 물리쳤다. 삶을 구걸하지는 않았고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얘기했다. 그게 망상이었는지, 자기변명이었는지, 깊이 사유한 끝에 나온 결론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성경 속 사도 바울같이 스스로를 그렇게 변호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내란죄를 심리하는 1심 법정을 하루 여덟 시간씩 30일 동안 조금도 놓치지 않고 보면서 기록해 두었다. 취재기자들은 마감인 오후 3시경이면 자리를 떴다. 나만큼 그 재판을 세세히 보고 기록해 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재판에 관여한 변호사들이 무엇을 변호하는지를 살폈다.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변호사는 법정에서도 각하라는 존칭을 쓰다가 재판장에게 지적을 당했다. 재판장이 대통령이었어도 법정에서는 피고인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어떻게 모시던 지존을 피고인이라고 부르냐고 하면서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그는 변호사가 아니라 법정에서도 비서인 것 같았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담당 재판장과 서로 감정싸움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변호사가 아니라 정신은 대법관이었다. 그가 재판 도중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퇴정해 버렸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담당 재판장이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인데 마구잡이로 혼자 막 떠들고 나가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재판에서 내란의 목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심리가 집중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재판의 알맹이였다. 전두환의 마음 속 깊이 있는 군사를 일으킨 진짜 목적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알맹이인 금은 흘러가 버리고 모래만 남은 재판 같았다. 검사들은 시중의 소문만 묻고 그 대답을 언론에 흘렸다. 언론은 그런 말들로 도배되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사건을 심판하는 법정에 있었다. 뇌물을 주었다는 국정원장의 변호사였다. 재판 시간의 대부분이 뇌물죄의 법리 논쟁에 사용되었다. 검찰은 산더미 같은 판례를 법정에 쏟아부었다. 판사가 판례를 모르거나 게을러서 그렇게 한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변호사들은 검찰이 제출한 판례에 대한 대응 의견을 말하느라고 주어진 시간을 법학의 학술토론에 소비하고 있었다.

나는 변호사들이 검찰이 던진 프레임에 걸려든 느낌이었다. 법률적인 의견진술이 필요하지만 그건 진실이라는 몸통에 비유하면 꼬리에 불과했다. 꼬리가 몸통을 온통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범죄의 고의성이고 그건 박근혜 대통령의 내면세계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정이나 청탁 돈에 대해서는 결벽증일 정도로 깨끗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면을 알려주는 수많은 사례도 있었다. 그 내면을 보석세공사같이 정교하게 변론문에 묘사해 주는 변호사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범죄가 성립하려면 외적인 행위와 같은 비중으로 내면의 인식이나 고의가 중요하다고 법과대학에서 배웠다. 고의가 없으면 범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재판거부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 재판정과 형사 법정에 서게 될 것 같다. 그가 관저 앞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담화문 같은 데서 그의 내면의 일부가 읽혀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란죄는 목적범이다. 목적이라는 건 내면에 존재하는 범죄의 초과주관적 요소다. 외형적 행위는 수많은 영상에 찍힌 그대로다. 담당 변호사들은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인지 그가 세상을 보는 눈과 그의 철학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법정에서 극사실화 같이 그려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호위무사는 변호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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