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⑮] 만주의 조선 재벌 ‘경성방직’과 김연수

해방 후 친일파를 단죄하는 법정에 경성방직 김연수가 섰다. 일본이 부여하는 총영사 등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다. 서순영 판사는 그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장점이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는 논리였다. 그 60년 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그는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 있었다. 60년 후의 법원은 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그 판결에 의혹을 품고 있다. 시대 조류에 편승한 역사를 모르는 판사의 오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진은 일제시대 경성방직 

1930년대 전반 경성방직은 봉천에 대표사무소를 개설했다. 경성방직은 조선의 명문가로 알려진 경주 최부자와 고창 갑부 김성수 집안이 주동이 되어 조선인주식회사설립 운동을 일으켜 만든 회사였다.

경성방직은 대련과 봉천에서 열린 산업견본시장에 참여해 직물 제조공정을 시연해 보였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애드벌룬을 공중에 띄우면서 직물을 선전했다. 경성방직은 이미 만주 지역 직물수요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경성방직은 폭주하는 주문의 물량을 대기 위해 간도에 있는 일본인 회사의 공장에 하청을 줄 정도였다.

1937년 7월 17일 북경의 광안문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중일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일본군이 상해와 남경까지 점령하자 중국 내의 방직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직포난이 심해졌다. 만주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경성방직의 제품들이 화북 일대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경성방직은 전쟁 중에도 열린 중국 각지의 섬유박람회에 참여했다. 직물을 짜는 시범을 보이는 한편 경성방직은 일본회사와는 다르다는 차별성을 강조했다.

중국인들의 반일본 정서 속에서 경성방직 제품이 날개돋친 듯 팔렸다. 경성방직은 기존 일본제품이 차지하던 중국시장을 장악했다. 물건이 없어서 수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성방직은 중국에 현지 공장을 설립했다. 봉천 남쪽 소가둔 벌판에 거대한 공장을 세웠다. 건설책임자는 최두선, 경리주임은 김상협이었다. 훗날 두 사람 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됐다. 현지 공장의 이름은 ‘남만방적’이었다.

경성방직과 남만방적은 밤낮없이 제품을 생산했다.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경성방직은 만주의 기업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경성방직은 하얼빈에 있는 오리엔털맥주를 인수했다. 러시아인이 운영하던 회사였다. 경성방직은 그 회사에서 일하던 독일인 맥주 기술자를 그대로 유임시키고 경리와 영업담당에 조선인들을 임명했다. 그 무렵 만주의 맥주시장은 일본의 기린맥주가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경성방직이 인수한 오리엔털맥주가 만주에서 일본의 기린맥주를 눌렀다. 매월 생산되는 맥주 15만병이 하얼빈 등지에서 기호상품이 됐다.

경성방직은 만주 최대의 봉천상공은행과 부동산회사를 사들였다. 그 회사는 봉천 최대의 대성호텔과 아파트단지, 상가, 주택을 소유한 회사였다. 경성방직은 이어서 만주제지와 만몽모직, 대련에 있는 대련기계공작소, 남만가스, 만주베어링회사를 인수했다. 경성방직은 조선에 있는 일본기업들도 사들이기 시작했다. 원산에 있는 조선석유주식회사, 부산의 조선중공업을 인수했다. 조선중공업은 상선이나 함선을 건조하고 철강 제품을 생산했다.

경성방직은 일본기업인 가네가후치공업이나 가와사키중공업 같은 회사들의 주식에도 투자했다. 경성방직은 조선인들이 만든 최초의 거대 기업집단인 ‘재벌’이 됐다. 재벌이란 용어는 당시 기자들이 경성방직의 급성장하는 사업체에 붙인 이름이었다.

기업은 나름대로의 숙명이 있는 것 같다. 일본 군부는 경성방직에 국방헌금을 요구했다. 군복을 만들 직물을 요구하기도 하고 위문품을 보내라고도 했다. 그 댓가로 경성방직의 경영자에게 만주의 명예총영사나 중추원참의 아니면 도의원 같은 명예직을 부여했다. 경성방직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법인 측면에서는 일제에 협조하고, 경영자는 개인적으로 상해임시정부에 은밀히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에게도 남몰래 자금이 보내지기도 했다. 일제하의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은 경성방직의 지원 자금이 생명수였다. 해방 후 경성방직은 한민당의 자금줄이었다. 경성방직을 재벌로 만든 경영자는 김연수라는 인물이었다. 일본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김연수

해방 후 친일파를 단죄하는 법정에 그가 섰다. 일본이 부여하는 총영사 등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다. 서순영 판사는 그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장점이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는 논리였다. 그 60년 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그는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 있었다. 60년 후의 법원은 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그 판결에 의혹을 품고 있다. 시대 조류에 편승한 역사를 모르는 판사의 오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로 또 거대 기업군을 이끈 경영자로서 일본당국과 협조관계를 맺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걸 친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단죄받기 위해서는 반민족행위가 필요 요건이다. 나는 그가 어떤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법률가로서 법인과 개인인 그를 하나로 본 것에 대해서도 언젠가 재심으로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재판은 후세의 법률가에 맡기고 이 글이 참고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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