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박흥식…종이장사에서 화신백화점 설립까지

박흥식과 화신백화점(1930년대 모습)

변호사를 하면서 부자들을 많이 봤다. 대통령이나 장관 그 친척들이 땅이나 건물을 몰래 사들이기도 했다. 땅값이 폭등하고 그들은 시세차익으로 대대손손 부자가 됐다. 겉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뒤로는 자기를 위하는 경우를 목격했다. 권력에 줄을 댄 그런 부자들이 있다.

건실한 기업가 부자도 봤다. 중고등학교 동기 중 하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사원으로 출발했다. 얼마 후 그는 회사에서 나와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 친구들은 파격적이고 저돌적인 면이 있었다.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는 부자가 됐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괜찮은 회사들을 50여개 인수했어. 나도 재벌반열에 말석으로 진입한 것 같아.”

내게는 그런 친구들이 더러 있다. 판자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라 미국와 홍콩등에 큰 재산을 가지게 됐다.

요즈음 보면 연예인들 중에도 부자가 많은 것 같다. 수백억 상당의 빌딩이나 집을 사는 게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우리가 암흑기로 인식하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인 부자들이 존재했을까. 나는 일제시대 조선인 부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읽은 적이 있다. 기억 더미 남아 있는 몇몇 내용을 추려 보았다.

나라가 망했어도 조선의 왕족이나 대신 출신의 양반들 중에는 개발이 예정된 경성 시내에 수십 채의 가옥을 사두는 등 부동산투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철종의 손자였던 왕족 이재현은 경성과 지방에 수많은 토지를 사들여 판매차익을 얻었다. 민씨 집안의 대표격인 민영휘는 엄청난 땅뿐 아니라 조선 한일은행과 여러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 구한말 세도가들은 여전히 부를 누렸다. 그들만의 모임인 ‘조선실업구락부’가 만들어지고 멤버십을 가진 그들만의 클럽이 존재했다. 그들은 여전히 잘살았다.

경성이 개발되면서 건축 붐이 일었다. 종로 네거리에 민규식 소유의 종로빌딩이 들어서고 그 맞은편에 장안의 부호로 알려진 한학수와 이철의 한청빌딩이 섰다. 현대식 일류호텔을 만들 계획이었다. 효자동에는 조선 최초의 데파트가 건축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세례를 받고 서민출신의 새로운 부자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박흥식 같은 인물이었다. 소년시절 평안도 용강읍내 쌀가게에서 일하던 박흥식은 스물네살 무렵 경성으로 올라와 지금의 을지로 일가인 황금정 일목에서 종이장사를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의 견제가 들어왔다. 그가 종이를 주문해도 수입상이 물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동경으로 건너가 종이를 제조하는 왕자제지와 직접 종이공급계약을 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 회사는 수입상으로부터 종이를 공급받으라며 거절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스웨덴이 세계 최고의 종이 생산국가인 걸 알았다. 그는 동경에 있는 스웨덴영사관을 찾아갔다. 거기서 일본의 왕자제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양지를 직접 수입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상인들의 견제는 집요했다. 이번에는 거래처들이 그가 수입한 종이를 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때 그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경성방직의 김연수였다. 동아일보의 대주주인 김연수는 신문사에서 사용하는 모든 종이들을 박흥식으로부터 구입하기로 했다. 김연수는 일본의 방직회사와 경쟁하면서 경성방직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무렵 경성에 미스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유명 백화점들의 지점이 들어서고 고관대작 출신 조선인 부자들이 일본백화점을 드나들었다. 박흥식은 종로에 화신백화점을 세워 일본백화점을 압도하는 대형백화점으로 성공시켰다. 그의 백화점 직물부에서는 경성방직 제품들을 판매했다. 그렇게 서구식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의 기업가군이 형성되고 있었다.

금광 열풍이 불면서 또 다른 형태의 부자도 생겨났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잡화상을 하던 방응모는 망치 하나를 들고 이산저산으로 금맥을 찾아다녔다.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평북 삭주의 교동이었다. 사람의 발길이라고는 닿은 적이 없는 계곡이었다. 그는 거기서 금을 찾아내 부자가 됐다. 그는 조만식과 이광수의 간청을 받아들여 부도상태에 있던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도 했다. 그외 금광열풍으로 부자가 된 최창학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시절 소리 잘하고 춤 잘추고 거문고를 잘 타는 장안 일등의 기생 김옥교가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인사동의 ‘천향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경성 시내에 조선풍의 최고급 대형호텔을 짓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최창학

부자들의 신분이 바뀌고 있었다. 빈농 출신으로 금광 부자가 된 최창학은 미국에서 리무진을 수입해 종로거리를 타고 다녔다. 그의 리무진은 조선 최초로 히터와 방탄유리를 장착한 차였다. 신분과 핏줄에 따라 차별하는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었다.

신세대 조선인 기업가들은 만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중국인보다 우대했다. 만주국 경찰에 수많은 조선인들을 고용했고 중국어를 구사하는 조선인을 만주국 관료로 기용했다. 만주에 세계적인 규모의 조선인 방적공장인 ‘남만방적’이 세워지기도 한다.

1946년 6월 13일 미국의 경제학자 에드윈 마틴은 봉천 근처에 있는 거대한 방적공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만주에 있는 일본인의 산업재산을 조사하고 있었다.

공장을 지키던 조선인 수위는 통역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열달 전만 해도 1000대가 넘는 직기에서 3천명이 넘는 조선인 직공이 일하던 조선인의 공장입니다. 조선 사람인 경성방직 김연수 회장의 재산입니다.”

마틴은 그 공장이 한국인 자본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는 보고서에 ‘김연수라는 한국인이 그런 거대한 기업을 진짜 일으켰는지 확인 할 수 없다’고 썼다. 일제시대 새로 탄생한 부자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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