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친일논쟁①]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경우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현확 총리. 신 총리는 신군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내각 총사퇴로 물러났다. <사진출처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천만 관객이 봤다는 바람에 호기심에 <파묘>라는 영화를 봤다. 풍수에 관한 우리의 정서를 녹여낸 작품이다. 나도 윤달이 든 해에 파묘를 해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유골을 화장해서 모시고 있다. 다만 영화 중에 씁쓸한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었다. 일제시대 벼슬을 한 친일파인 조상귀신이 자손들을 저주하고 죽이는 설정이었다. 그 친일파 조상귀신의 뒤에는 일본의 흉칙한 장군귀신이 있었다. 영화에는 일본을 증오하고 그들과 싸우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일까.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꼭 미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 영화를 보면서 민족문제연구소측과 소송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 날 고교동기로 부터 전화가 왔다. “이 새끼들이 우리 아버지를 친일파 인명사전에 수록하겠다는 거야.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도와줘.” 친구는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었다.

“왜 친일파래? 일제시대 뭘 했는데?” 내가 되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일제시대 고등문관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상공성에서 근무했어. 2차세계대전 말기 그 상공성이 군수성으로 이름이 변했어. 해방이 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험난한 세월에도 아버지는 친일파로 거론된 적이 없어. 그런 아버지를 저놈들이 일제시대 공무원이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친일파라고 하는 거야.”

내가 알기로는 해방 후에도 단순한 친일이 아니라 민족을 괴롭히는 행위를 했어야만 친일파로 처벌을 받았다. 없어진 조선을 위해 모두 죽창을 들거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친일파의 개념이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법정에서 논쟁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측 대표는 법정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은 식민잔재의 인적정리 및 청산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구조화된 파시즘적 지배구조와 사상 및 식민지적 유습을 청산해야 합니다. 전 국무총리였던 신현확이 해방 후 경제성장에 기여하면서 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친일파인 것은 맞습니다. 친일은 구조적인 문제이지 한 개인의 인격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일은 양심의 문제로만 파악할 게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념은 사회적으로 이미 통용되고 있습니다. 신현확 전 총리의 식민지 체제의 가담은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지향의 비도덕적 행태로서 반역이고 국제범죄의 협력자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에대한 반론을 해 보시죠” 재판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신현확이라는 인물은 이 땅이 일본의 영토가 되어 있을 때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국적은 일본이고 일본 시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성실하게 공부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시대 보통사람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머리가 좋아 힘든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됐다는 점만으로 구조적으로 친일파에 속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상대방인 민족문제연구소측에서 즉각 반박했다.

“일제 식민통치를 체험한 일반 민중에게는 말단 순사들이 악질적인 친일파로 각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이들은 지배체제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면의 현실입니다. 그 배경에는 상부구조가 작동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폭압적 지배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현확의 경우 일제의 공직에 있었다는 자체 만으로 고의성이 높고 이완용보다 국제사회에 더 큰 피해를 끼친 것입니다.”

그 말에 내가 이렇게 반박했다.

“일제시대 고위공무원이면 친일파고, 악질 순사나 헌병은 하위직이니까 아니라는 게 구조론인가요? 도대체 단체의 목적이라고 정관에 규정되어 있는 구조화된 파시즘적 지배구조의 청산이라는 게 뭡니까? 역사를 주체적으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제 주체적으로 청산하는 행위가 전 총리에게 친일파의 딱지를 붙이는 겁니까? 이 자리에서 당신들이 주체성 같이 여기고 있는 그 진리를 설파해 제가 승복하게 해 주시죠.”

법정에 나온 그들의 대표는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비웃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변호사라는 직업을 ‘자본주의의 첨병’이나 ‘고용된 양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들은 슬며시 신현확 총리의 이름을 친일파 명단에서 뺀다고 뒤에서 통보해 왔다. 공식적인 패배의 기록을 만들기 싫었던 것 같다. 상대방에게 이념의 딱지를 붙여놓고 말살하려는 악령이 이 사회를 걸어다니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놓고 남을 심판하는 존재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번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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