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친일논쟁’을 연재하는 까닭
“재야의 평범한 시민으로서 역사에 대한 주관적인 사견을 남겨두고 싶다”
내가 사는 바닷가의 집에서 5일마다 열리는 북평시장이 멀지 않다. 아내와 함께 시골장을 구경하러 갔다. 어린 시절 먹던 풀빵 장사가 있었다.
“나 어릴 때 풀빵을 좋아했는데 사먹어요.” 아내가 말했다.
70대 쯤의 노인이 국화 문양이 새겨진 무쇠틀 구멍에 기름을 바르고 양은 주전자에 든 밀가루 반죽을 반쯤 부었다. 거기에 팥소를 조금 집어넣은 후 다시 그 위에 흰 반죽을 덮었다. 잠시 후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풀빵이 탄생했다. 2천원에 다섯개인데 노인은 덤으로 하나를 더 주었다. 그게 시골장터 인심이다. 군고구마도 샀다. 파는 남자는 값이 비싸다고 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기에는 5천원에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았다. 덤까지 주었다. 바삭바삭한 껍질의 작은 풀빵을 입속에 넣으니까 녹을 듯 뜨거운 팥소의 단맛이 입안에 향기롭게 퍼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먹는 느낌이었다. 시장 뒤켠의 오래 된 건물에는 주막과 허름한 국수집들이 있었다.
이상하게 동해 바닷가 마을에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허물어질 듯한 낡은 일본식 목조주택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마치 일본의 시골마을을 연상시키는 집들이 나란히 있는 동네도 있다. 세월의 무게에 기와가 내려앉고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침묵 속에서 그 집들은 뭔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였고 한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 집들 안에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가족이 모여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대를 보냈을 것이다.
나는 무너져 내린 일본식 주택을 보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 그들의 소리들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변호사로 법정에 오른 일제시대의 역사를 다룬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친일단죄의 폭풍이 일었었다. 나는 그 단초가 된 배경 사실을 알고 있다.
1995년경 어느 날 나는 강남네거리 부근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몇 명의 변호사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 있던 정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나보고 조상 땅을 찾아달란다.”
“그 땅이 얼마나 되는데?” 내가 정 변호사에게 물었다.
“서울의 북아현동땅을 비롯해서 경기도에만 1천억원대의 땅이 있어. 그리고 이완용의 땅도 경기도 일대만 해도 4백만평이 넘는다고 그래. 가격으로 치면 수조원일 거야.”
“아무리 돈이 좋아도 친일파 변호를 하는 건 안 되지.” 나의 생각이었다.
“봐라. 친일파 땅이라고 어디 딱지 붙여놨냐? 조상이 땅을 가지고 있었다면 후손이 그걸 상속하는 게 우리 민법의 대원칙 아니냐. 땅을 가지게 된 원인을 따지면 사기꾼이나 도둑놈 땅도 못 가지게 해야 하는 거지. 어쨌든 나는 친일파 땅을 찾아주고 부자가 될란다. 변호사가 법대로 하는데 어느 놈이 시비를 걸어?”
그 얼마 후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땅 찾기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보도를 봤다. 신문은 이완용의 땅에 대한 판사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친일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을 역사적으로 단죄해야 할지 모르나 국가가 법적인 장치도 없이 막연하게 국민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법치주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 판결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모순은 친일의 뿌리를 뽑지 못한 데 있다는 논쟁에 불이 붙었다. 특별법이 제정되고 친일반민족행위를 색출하는 위원회가 생겼다.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파헤쳐져 친일의 팻말을 목에 달고 뉴스화면에 등장했다. 뜻밖의 인물들이었다. 민족을 얘기한 소설가 김동인이 있었고, 신현확 국무총리가 있었다. 그리고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김성수 형제도 있었다. 일본군 장교를 한 박정희 대통령도 친일파라고 했다.
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몇 명의 후손들이 내게 변호를 의뢰해 왔다. 이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구체적으로 변호하는 일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어려서부터 나의 뇌리에는 친일파를 증오해야 할 의무감이 심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친일’이란 단어는 종교인들의 이단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동과 흡사한 의미였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고약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죄인 편에 서야 한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각도 또는 거꾸로 봐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직업적 프리즘을 통해 일단 그 시대를 한번 보기로 했다. 정권이나 특정 학자들이 무조건 따라오라고 만들어 두었던 역사지도 속의 길을 벗어나 그 시절의 생생한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몇 년 동안 국립중앙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자료 속에 파묻혀 살았다. 독립투사들의 재판기록과 조서들을 보았다. 일제시대 36년간 발행된 신문과 잡지들을 거의 빠짐없이 읽었다. 그 시대상황을 리얼하게 표현한 소설이나 기행문, 문학작품들을 다양하게 읽었다.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하게 기록된 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또는 위원회에 들어가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이제부터 그때의 체험과 깨달음을 글로 써서 남겨두려고 한다. 변호사로서 특정인을 위해 쓰는 편향된 글은 아니다. 재야의 평범한 시민으로서 역사에 대한 주관적인 사견을 남겨두고 싶다. 역사해석을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이 독점하면 안된다고 생각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