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영등포교도소 강도범 지금 어디서 무엇을?
“강도를 강도라고 해주신 말씀 감사했습니다”…강도에게 성질을 냈었는데.
오래 전 서울 오류동 도로변에 있는 영등포교도소에서였다. 메마른 금속음이 들리는 녹슨 철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우중충한 장방형의 낡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입구 광장의 왼쪽 끝에 축사 같은 길다란 건물이 스산한 느낌을 풍기면서 웅크리고 있었다. 늙은 교도관 한명이 담당하는 변호인 접견실이었다. 나는 흉악범인 강도와 마주 앉아 있었다. 당시는 CCTV도 없고 갑작스런 흉악범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줄 철창이나 칸막이도 없었다. 교도관도 둘을 놔두고 어딘가 가버렸다. 흉악범인 그가 나를 보자마자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소사실 중 강도죄는 부인하려고 하는데 변호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과가 많은 그는 재판에는 이력이 난듯 했다. 그는 변호사를 공범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하죠?”
“증거가 없으니까요. 내가 술주정뱅이를 보면 벽돌로 뒤통수를 까고 지갑을 꺼냈어요. 그리고 쭉 뻗어버린 시체같은 걸 근처 골목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자기를 그렇게 했는지 모를 거 아닙니까? 잡아떼면 그만이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런 짐승 같은 존재와 더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전과자들에게 전도하는 목사가 부탁해서 그냥 한번 그를 보러 간 것이다. 어떤 법률사무소도 그의 변호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변호할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강도 놈이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 나갔다. 내 말에 그가 순간 경악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내가 강도라고 해도 보는 앞에서 강도라고 하다니? 그게 변호사가 할 말이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흥분하는 것 같았다. 일어서서 당장 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접견실의 좁은 공간에는 그와 나 둘만 있었다. 그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여본 적도 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아차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는 내가 생각지 않은 말들이 계속 튀어 나가고 있었다.
“너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강도짓을 하고도 전혀 참회가 없어. 그렇다고 죄를 지은 동기가 딱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 있고 힘 있는 집안도 아니고. 그저 남은 건 잔머리뿐이군. 그게 통할까? 판사는 머리가 더 좋은데”
나는 그렇게 내뱉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를 변호할 마음이 없었다. 변호는 범죄를 두둔하고 은닉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행위는 잘못했더라도 최소한 참회하는 내면이라도 있어야 그걸 재료로 해서 변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교도소 안쪽으로 나있는 검은 구멍같은 길로 들어가면서 나를 뒤돌아보고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너 기다려, 내가 나가면 꼭 죽여 줄께”
그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닐 것 같았다. 그는 능히 그럴 것이다.
성경 속의 예언자들을 보면 세상이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목이 잘리기도 했다. 자기들의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도 그런 것 같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엉뚱한 말들이 튀어 나갔다. 자제할 수도 없었다. 대개는 손해가 날 내용들이었다. 내 입을 움직이게 하는 주재자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 주재자는 마음도 다스리는 것 같았다. 협박을 받아도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분명 소심한 인간인데도 누군가 담대하게 나를 만들어 주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변호를 하게 됐다. 재판은 항소심이었다. 그는 1심에서 이미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수사기록에는 짐승 같은 흉악범의 묘사만 있었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만나 그가 처참하게 일그러진 배경을 알아냈다. 변론서를 쓰는 순간 그가 내게 빙의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입장이 되어 할 말을 했다.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고를 며칠 앞두고 그가 편지를 보냈다. 교도소 안에서 사용하는 용지에 볼펜으로 꼭꼭 눌러쓴 글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저는 지금 몸도 마음도 춥습니다. 변호사님한테 강도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날 밤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복수하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강도가 맞는데도 여태까지 그렇게 부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모두들 눈치를 보고 내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던 거죠. 지금은 변호사님의 솔직성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살아봐야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여겨왔습니다. 나를 포기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반성보다는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형을 받아도 판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님이 저를 변호하는 걸 보면서 저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쓰레기 같은 놈 아닙니까? 부끄럽지만 저도 정직한 말 하나는 할랍니다. 제 변호를 부탁한 목사님이 전과 5범 아닙니까? 저도 징역을 살고 나와 앞으로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라도 풀어보려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강도를 강도라고 해주신 말씀 감사했습니다.”
그를 생각하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떠올랐다. 한 명은 세상을 원망하고 예수에게 당신이 메시아면 자신을 살려보라고 빈정댔다. 다른 한 명은 참회를 하면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예수는 그를 향해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다. 내가 맡았던 강도범은 선고된 판결에서 징역형이 10년 깎였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