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도대체 저의가 뭡니까?”…”나는 공명심에 들떠 이러고 있나?”
30여년 전의 그 사건이 요즈음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법정에서 교도소 인권 문제를 꺼냈다가 나는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있었다. 이왕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고 기자들에게 한 사람이 교도관들에게 맞아 죽은 사실을 얘기했다.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날 밤 사무실 책상 위의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킬 때 쯤이었다. 적막한 허공 위로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한겨레신문 사회부 기자입니다. 지금 법무부에서 보도자료를 보내왔습니다. 변호사님이 말한 재소자가 맞아죽은 게 아니라 병사라고 설명했더라구요. 기사가 나가기는 힘들게 됐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을 처음으로 맞딱뜨리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MBC 보도국의 이상호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거 뉴스로 보도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겠어요. 위에서 압력이 들어와 못하게 됐어요.”
내가 폭로하는 자리에 있었던 다른 신문사 기자들한테서도 같은 내용의 전화가 왔다. 법무부는 언론을 철저히 다 막아버렸다. 기자들은 내 말을 더 신뢰하면서 보도는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언론의 한계를 알 것 같았다. 허탈했다.
다음 날 오후 공판담당 변 검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상에 대고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도대체 변호사를 계속하실 생각이 있는 분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자들에게 의문의 죽음을 얘기했는데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요? 살인의 의혹이 제기되면 검사가 수사를 해서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국가가 권한을 준 거 아닙니까? 지금 변호사한테 물을 소립니까? 법대 시절 저는 검사가 정의를 추구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직위라고 배웠는데 변 검사님의 지금 행위는 뭡니까?”
그는 내 말을 일축하고 자기 말을 계속했다. “법정에서 그렇게 리얼하게 까발릴 필요가 있습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언론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너무 공명심에 들떠 계시는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공명심까지 걱정해 주는 겁니까? 공명심에 들뜨든 가라앉든 그건 내 인격의 문제고 지금 검사님이 하는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노골적인 압력 아닌가요? 업무방해고 직권남용으로 보이는 데 어떻습니까? 저를 협박하는 지금 행동이 개인적인 겁니까? 아니면 조직을 대변해서 하는 겁니까? 그리고 변호사를 계속할 거냐고 묻는 건 협박인데 내 변호사자격을 당신이 줬습니까? 말해보세요.”
쌍욕이 튀어 나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제가 뭐하러 개인적으로 이런 전화를 드리겠습니까. 윗분들 의견을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의견도 조금은 들어가 있습니다. 하여튼 검찰의 입장으로 알아주십쇼.” 그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불쾌했다.
그 며칠 후 법무부의 고위책임자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지금 교정국장을 청송에 내려보냈어요. 인권유린을 조사해 보라고 말이죠. 교정공무원도 어느 면에서는 막가는 사람입니다. 그 숫자만 해도 1만2000명이고 모두 절벽 위에 있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버리면 우리가 부려먹을 수가 없어요. 재판에서 공격 수위를 적절히 조절해 주면 좋겠어요.”
말은 부드럽지만 입을 다물라는 협박으로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다면 교정행정에 대해 정식으로 반발한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는 게 우리의 입장입니다.”
나는 국가의 다양한 이면을 경험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될 때 국민들은 사법부에 호소하게 되어 있다. 판사는 그런 불법을 판단해 주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며칠 후에 나는 담당 재판장의 판사실로 가게 됐다.
“왜 사건 내용을 언론에 흘리죠? 도대체 저의가 뭡니까?” 재판장은 ‘저의’라는 단어를 썼다. 나는 그 죄수로 부터 ‘정의’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재판장은 ‘저의’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바람 부는 겨울 벌판에 혼자 서서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 정의는 뭐지? 그리고 내가 어떤 저의를 가지고 있지? 나는 공명심에 들떠 이러고 있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