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일흔 넘어 완성된 ‘오랜 꿈’
동해항의 긴 방파제 위의 작은 등대에서 신비로운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다. 책상 위의 시계가 아침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며칠 전 바닷가 집으로 이사를 왔다. 노년의 ‘마지막 거처’라고 생각하고 정한 자리다.
젊은 날부터 품었던 오랜 꿈이 있었다. 동해안의 바닷가를 따라 한없이 길을 걷는 나그네가 되어 보는 것이었다. 밤이 되면 어둠 속에 스며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버려진 폐선 옆 모래밭에서 자고 싶었다. 마당 줄에 매달린 오징어와 방석만한 가오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갯마을을 기웃거리며 걷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작은 집을 짓고 싶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 서재와 바다를 나의 천국으로 만들고 싶었다.
젊어서는 등에 진 무거운 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가족의 입에 밥을 넣어야 했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눈물을 흘린다면 철학과 도의 추구는 위선이었다. 개미같이 매일매일 등짐을 지고 먹이를 날랐다. 세월이 흐르고 칠십 고개를 오르니까 이제 짐을 내려놓아도 될 때가 왔다.
나는 오랜 꿈을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저지름에 늦은 나이는 없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주저하는 순간 그건 진짜로 너무 늦은 것이 된다.
그동안 모든 걸 아내가 해주었다. 넥타이 하나 양말까지도 아내가 골라주었다. 벽에 못 하나 박을 줄 몰랐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뒤늦게 아내와 사별했던 장군 출신 한 노인의 말이 기억의 먼 언저리에 남아있다. 모든 걸 다해주던 아내가 갑자기 저세상으로 가니까 머리속이 하얗게 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걸 극복하는 데 2년쯤 걸렸다고 했다.
나는 중간 훈련 단계로 실버타운을 선택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밥이 해결되는 곳이었다. 그곳에 묵으면서 나는 작은 중고차를 사서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그동안 녹내장 때문에 운전을 하지 않았다. 묵호의 재래시장부터 곳곳을 돌아다녔다. 밥집, 옷수선집, 북평 오일장의 고구마 파는 곳 등을 익히고 다녔다. 유튜브를 통해 세탁기, 전자레인지, 청소기 등의 사용법을 배우고 떡국, 김치 볶음, 미역국,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배웠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실습하고 마트에 가서 상품 이름들을 반복해서 외웠다.
어느날 단골로 가던 바닷가 언덕의 막국수집 젊은 사장이 그 앞에 있는 자기 집을 사라고 권했다. 그의 아버지가 시인이고 교수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집을 사면서 나의 오랜 꿈을 실현하기로 했다. 집도 하나하나 나의 땀이 들어가야 정이 붙을 것 같았다. 나의 집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 하나하나를 직접 해보기로 했다.
철거 작업, 창호, 배관, 전기, 조적, 타일, 단열, 외부칠, 내부 칠 등을 유튜브로 배워가면서 인부들을 구해 직접 했다. 기술자 옆에서 아내와 함께 일용 잡부 일을 했다. 바닷가의 오래된 마을에 어울리게 약간은 촌스럽게 그리고 소박하게 하기로 했다. 내부 벽을 그냥 옛날의 초등학교 교실같이 희게 칠했다. 얼룩이 묻어도 언제든지 흰 페인트만 사서 그냥 덧칠하면 되는 것이다.
날씨가 궂거나 인부들이 사정이 생기면 기다렸다.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는 나이다. 되는 대로 하면 된다. 목표를 세우고 강행할 필요가 없다. 그냥 조금씩 천천히 더러 쉬었다 하면 된다. 다섯 달 만에 오랜 꿈이 실현됐다.
칠십년을 살았던 서울의 살림을 바닷가의 마지막 거처로 옮겼다. 동해주민으로 이전등록을 했다. 이제는 노인이다. 무거운 물박스를 옮기기도 힘에 벅차다. 만약을 생각해서 계단 옆에 레일을 깔고 미니 리프트를 설치했다. 유튜브에서 찾아 낸 설비다. 걷기 힘들 때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오랜 꿈이 노년에 완성됐다. 오늘은 이 글을 쓰다가 배고프면 간단히 떡국을 끓여 먹고 싶다. 엊그제 유튜브에서 백종원씨가 가르쳐 주는 걸 봤다. 배우고 저지름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