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영혼이 살아있는 착한 노숙자들
가수 송창식씨가 화면에서 벙글거리며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부르던 노래 ‘고래사냥’은 우리세대의 고향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처참했던 젊은 시절을 얘기하고 있었다.
“노숙자생활을 했었어요.겨울에 너무 추웠어요. 몸에서 따뜻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찬 공기가 들어오는 게 싫었죠. 그래서 숨을 아주 천천히 쉬는 연습을 했죠. 그게 노래를 부르는 호흡 훈련으로 아주 좋았던 것 같아요. 노숙자일 때 여름에도 겨울옷을 껴입고 다녔죠. 그렇게라도 옷을 가지고 있어야 다시 겨울이 오면 견딜 수 있었으니까. 세시봉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도 거기서 밥을 먹여준다고 하니까 갔어요. 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그는 성공한 대단한 가수다. 어떻게 자기를 저렇게 드러낼 수 있을까 신기했다. 그가 덧붙였다.
“나는 삶에 두려움이 없었어요. 노숙자까지 해봤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아마도 그는 배가 고파도 추워도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는 음유시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그를 보니까 기억의 언저리에 남아있던 가수 양희은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20대 초에 갑자기 집이 가난해져서 내가 가장이 되어 돈을 벌어야 했어요. 노래를 부르는 재주밖에 없었는데 내가 설 무대가 없었죠. 송창식씨가 내 사정을 듣더니 선뜩 30분 무대의 10분을 내주는 거예요. 그렇게 밥벌이의 기회를 만들어줬어요.”
가수 송창식씨는 선한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그는 평생 돈이나 인기보다 어떻게 좋은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았다고 고백했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내 마음 기슭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예술혼이 그를 살게 한 것이 아닐까.
내가 아는 80대 중반의 변호사가 있다. 우연히 그의 과거를 아는 한 노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젊어서 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했어요. 그때 매일 같이 박스를 얻으러 오는 넝마주이가 왔어요. 그 시절 그런 사람을 양아치라고 불렀죠. 지금의 노숙자 신세 비슷한 거죠. 이상하게 그는 항상 손에 책을 들고 있더라구요. 하도 기특해서 내가 시장통 국밥집에 그 청년이 1년 동안 와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돈을 내준 적이 있어요. 몇 년후 그 청년이 막 결혼한 아내와 함께 저를 찾아왔더라구요. 부부가 저에게 절을 하고 봉투에 든 돈을 내놓더라구요. 고시에 합격해서 검사가 됐다고 하면서요.”
내가 살던 시대 고시는 개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밧줄 내지 사다리인 셈이기도 했다.
아는 목사가 있다. 그는 젊은 날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제대하고 고향 바다에 가서 다시 고기잡이를 하는데 원인 모르게 몸이 아팠다고 했다. 그 아픔을 견디기 위해 소주를 계속 마시다가 알콜 중독이 됐다. 술을 사 먹기 위해 부두에 정박한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훔치는 바람에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에 노숙자가 되어 어시장통의 쓰레기통 옆에서 살았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어느날인가부터 그는 한 노숙자시설에 들어가 같은 노숙자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됐다. 그 단체에서 그를 신학교에 보내줬다. 그는 그렇게 목사가 됐다고 했다.
내가 본 그들은 인생의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쓰러진 그 땅을 딛고 일어섰다. 인동초 같이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노숙자 비슷하게 허름한 옷을 입고 서울역 부근과 탑골공원 뒷골목에 간 적이 있었다. 사회의 바닥으로 내려가 보는 ‘거리의 변호사’역할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투명인간인 걸 발견했다. 버려진 강아지를 보면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교회 앞에 노숙자가 비를 맞고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없었다.
내가 길바닥에 앉아있으니까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비슷한 처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노숙자가 지나가다가 핫팩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또 다른 노숙자가 털실로 짠 목도리를 주었다. 또 다른 노숙자는 하나 얻었다면서 기모바지를 주었다. 약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게 뭘까, 인간이 뭘까, 지금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