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 칼럼

    [엄상익의 시선] 길고 긴 노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아버지는 오십대 중반에 정년퇴직을 했었다. 삼십년 동안 다니던 회사였다. 퇴직한 다음 날 아버지는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출근 시간에 이렇게 집에 있으니까 이상하다.” 아버지는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수십년 다니면서 아버지는 조직의 부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퇴직한 후에 읽겠다고 평생 애지중지하던 문학전집들도 아버지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공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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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엄상익의 시선] 반세기 전 참선배들의 참충고 덕분에…

    내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줄 때 그들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나는 그 두 명에게서 ‘깊이 있는 대화’를 하는 법을 배웠다. 말 한마디를 해도 그 의미가 있을 때까지 속에서 말이 여물게 기다렸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깊이와 무게를 얻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본문에서 대학 2학년 무렵이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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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엄상익의 시선] 당신은 어떤 묘비명을 남기고 싶은가?

    카잔차키스의 묘비. 거기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고 써있다.   산과 들을 다니다 보면 오래된 무덤들이 즐비하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돌보지 않은 어떤 무덤은 그 앞에 있던 비석이 기울어져 땅에 묻혀가기도 했다. 이끼 낀 그 비석에는 무덤 주인의 조선시대 벼슬이 강조되어 새겨져 있다. 내가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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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엄상익 칼럼] 노년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과 받아들임 아닐까?

    노년은 가난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시기인 것 같다. 서울 법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을 하고 박사를 한 친구가 주차관리원을 하다가 쫓겨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울 법대를 나오고 평생을 고시 낭인으로 지내면서 지하철 행상을 하는 사람의 가난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70대인 나는 또래의 가난을 너무 흔하게 본다. 인생은 ‘생노병사’의 고해라고 하는데 수명이 연장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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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엄상익의 시선] 조상 중에 내시가 있다면…

    엄홍도 정려각. 강원도 영월에 있다. 나의 블로그에 댓글이 하나 왔다. 당신의 조상 모습이 <왕과 비>라는 역사드라마에 있으니 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거의 30년 전의 작품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초반에 ‘엄 자치’라는 내시가 등장한다. 왕이 요 위에 엎드려 있고 내시 엄 자치가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왕이 내시에게 품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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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옛 골목

    [엄상익의 시선] “어지러운 세상…그래도 친구가 있어서”

    중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동네 친구 세 명이 있었다.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죽고 못 살았다. 그런데 우리 네 명의 구성이 묘했다. 두 명은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리고 두 명은 가난한 집이었다고 할까. 부잣집 중 한 집은 아버지가 섬유로 부자가 된 사업가였고 다른 한 집은 아버지가 공대학장이고 특수기술을 발명해서 기업들의 대접을 받았다. 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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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드라크루와 자화상

    [엄상익의 촌철] 인간의 ‘심미안’은 어디서 오는 걸까?

    변호사를 하면서 만났던 한 화가를 돌이켜 본다. 그는 평생 계곡과 인물만을 그렸다. 그가 그린 계곡 그림을 잠시 빌려서 사무실 벽에 걸어놓은 적이 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 영혼이 바위 아래 고여있는 어두운 계곡물 위에서 떠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림속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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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대법원 청사

    [엄상익 칼럼] 권력에 유착하는 저질 판사 어떻게…

    윤준 고등법원장의 퇴임 인터뷰기사를 읽었다. 그는 사법부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관의 임명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가 이런 말도 했다. “일부 국민은 폭도가 법원으로 쳐들어갔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을 겁니다.” 그는 사법부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 것 같았다. 내가 30대 중반 잠시 정보기관에서 일을 할 때였다.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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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엄상익 칼럼] 전두환 내란법정에서 어르신이 한 말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현확 총리. 신 총리는 신군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내각 총사퇴로 물러났다. <사진출처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삼십대 중반 대통령의 두뇌역할을 하는 조직에서 잠시 일했던 적이 있다. 정부기구인 것 같기도 하고 비밀조직인 것 같기도 하고 그 정체가 묘했다. 하여튼 그 조직이 하는 일은 굵직 굵직했다. 나는 그 조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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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시선] “싸움은 맷집이다”

    중학교 입시를 막 치고 났을 때였다. 이제 한숨을 돌리며 놀 수 있나 싶었는데 엄마가 나를 유도 도장에 보냈다. 뚱뚱하고 물러터져서 좀 야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사범에게 특별 부탁을 했다. 나를 매일 스무번 정도 패대기 쳐달라고 했다. 운동이 아니라 폭력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가벼워지고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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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30년 전 법정의 비상계엄 논쟁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앞으로 헌법재판소와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투어 질 것같다. 1980년5월17일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16년 후 그의 비상계엄확대는 내란 행위가 되어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나는 그 법정에서 검사와 전두환의 참모이며 이론가인 허화평씨의 치열한 논쟁을 보았다. 그리고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의 증언을 들었다. 공소장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내란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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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나는 내 ‘천직'(Calling)을 사랑하고, 또 고맙다”

    내가 평생을 드나든 법정은 무대 같았다. 높은 단 위의 판사가 주역이고 검사가 조역이었다. 변호사는 순간의 장면에 등장하는 단역 같다는 느낌이었다. 내 경우는 단역이라도 어떤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법정이라는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더 희극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내가 처음 변호사를 시작한 1980년대초는 판사실이 활짝 열려있었다. 변호사들이 판사실을 찾아가 방아깨비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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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탄핵정국…자해행위는 하지 말아야

    총선거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의사친구에게서 어제 밤 늦게 전화가 왔다. “나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해.” 뜬금없는 소리였다. “왜?” 내가 되물었다. “부정선거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한 대통령도 잡혀들어갔는데 이제 저놈들이 나를 그냥 두겠어? 내가 그래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모임에서는 꽤 유명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 가스총을 사서 가지고 다녀. 내가 출국금지 조치가 내렸는지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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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시선] “마음 불편한 분들, 북평 오일장에 와보세요”

    나는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이면 장터로 간다. 북평장터는 흘러간 시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 같이 여러 시대의 건물들이 겹쳐져 있다. 일제시대 지은 것 같은 낡은 목조주택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빨갛게 녹슨 양철 지붕 아래 집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나무 기둥은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버티고 있다. 뒷골목으로 가면 시간이 정지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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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하늘나라로 가는 여행비용

    내가 40대쯤 한참 변호사 일에 정력을 쏟아붓고 있을 때였다. 이따금씩 법정에서 허리가 굽은 늙은 변호사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재판장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지 손나팔을 귀에 대고 계속 다시 묻고 있었다. 재판장의 표정이 ‘이제 그만 쉬시지 왜 나오시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내 또래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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