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조상 중에 내시가 있다면…

나의 블로그에 댓글이 하나 왔다. 당신의 조상 모습이 <왕과 비>라는 역사드라마에 있으니 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거의 30년 전의 작품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초반에 ‘엄 자치’라는 내시가 등장한다. 왕이 요 위에 엎드려 있고 내시 엄 자치가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왕이 내시에게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한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모반을 일으킬 인물이 누굴까?”
그 엄청난 질문에 내시 엄 자치는 깜짝 놀라면서 말을 아낀다. 말 한마디에 목이 달아날 위험이 닥쳐올 수 있는 것이다. 왕이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한마디 툭 던진다.
“모반을 한다면 수양대군밖에 없어.”
내시 엄 자치는 그 말을 가슴 깊숙이 새기는 것 같았다.
왕은 엄 자치를 신임해 경호까지 맡긴다. 엄 자치는 내시들을 무장시켜 왕의 주변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엄자치는 단순한 성격 같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왕에게 절대 충성하는 모습이었다. 신하들 사이에서는 왕이 환관 정치를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왕인 문종이 몇몇 신하와 대군들을 불러놓고 활쏘기 대회를 개최했다. 왕은 환관인 엄 자치도 참여시켰다. 엄 자치가 활을 들고 과녁에 정확히 맞추었다. 그 실력을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문종은 환관 엄자치에게 그 자리에 참석했던 수양대군과 실력을 견주어 보라고 했다.
“어찌 미천한 신분이 감히 대군과 겨루겠습니까?”
엄 자치는 펄쩍 뛰면서 극구 사양했다.
“활쏘기에 어찌 신분의 귀천이 있겠느냐”
문종은 그렇게 말하면서 수양대군에게 활을 잡도록 강권했다. 수양대군이 활을 들었다. 얼굴에 엷은 굴욕감이 스쳤다. 엄 자치가 후일 왕이 되는 수양대군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복선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드라마의 중간에 역사의 해설자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
“엄 자치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는 수양대군을 암살하려는 인물이었다.”
엄 자치가 실존했던 인물인 것 같았다. 그걸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화면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나의 조상이기도 했다. 조상 중에 내시가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에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내시 하면 장애를 가진 보통 이하의 인간이고 간신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보통 집안에서는 숨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얼마 전 종친회장과 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종친회 엄기영 부회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조선시대 엄씨들의 삶의 기록이 없을까요?”
그 말에 엄상호 종친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이후 엄씨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2백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 엄씨들은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절대 엄씨가 아닙니다’라면서 자신의 피를 부정하며 살았는데 어떻게 글을 남길 수 있었겠어요? 아무것도 없죠.”
나는 나의 뿌리인 먼 조상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먼 조상 중의 한 사람이 내시였다면 그 신분은 천대받는 상민이었을 것이다. 그는 왜 남자임을 포기하고 궁중으로 들어갔을까. 내시는 벼슬을 하고 출세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시인 엄 자치는 왜 그 무서운 세조의 암살을 기도했을까.
나는 인공지능인 코파일럿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내시 엄 자치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인가?’
‘네, 엄 자치는 조선시대 실존했던 환관입니다.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 임금을 모셨습니다. 엄 자치는 조선 초기의 궁중정치와 권력다툼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그의 생애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 혼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고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중 사망했습니다.’
인공지능인 코파일럿은 조선왕조실록에 내시 엄 자치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생애는 어떤가?’
내가 다시 물었다.
‘엄 자치는 평안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 환관은 주로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환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세종 5년 환관이 되어 이름을 자치(自治)로 하사 받았습니다. 그는 수양대군이 부상을 입었을 때 문종이 자기 대신 문병을 보낼 정도로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장에 뛰어났고 무술도 출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관노비로 강등되어 제주도로 가는 길에서 1455년 음력 3월27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 사건들과 관련이 깊으며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화면 속에서 역사서의 갈피에서 신음하던 먼 조상이 탤런트에게 빙의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조상 엄자 치는 내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