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정일의 방방곡곡] 지리산 피아골에서 만나는 연곡사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사진 신정일>

피아골. 이름만 들어도 섬짓했던 피아골은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한말 의병전쟁 때 결전의 현장이었다. 더구나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 때문에 토벌대 및 군경과 치열한 접전이 수없이 벌어졌다.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골짜기마다 붉게 물들었기에 피아골이라고 붙여졌다고도 하며 그들의 넋이 나무마다 스며들어 피아골의 단풍이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파아골에 자리잡은 절 연곡사(然谷寺)는 통일신라 진흥왕(545)때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하였으며 나말여초 시기에는 수선도량으로 이름이 높던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에 의하여 불에 탄 뒤 인조 5년(1627년)에 소요대사 태능이 절을 다시 지었다. 연곡사는 그 뒤 영조 21년 무렵에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만드는 밤나무를 대는 율목봉산지소로 지정되어 있었고 1895년까지 왕실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밤나무의 잦은 남용으로 문제가 생겼고 그 때문에 절이 망하게 되자 스님들이 절을 떠나 결국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07년 전라도의 명장 고광순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정규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이곳 연곡사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 수군에 의해 고광순을 비롯한 의병들은 야간기습을 받아 모두 순절하고, 절은 의병들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처음 연곡사를 찾았을 때만 해도 1965년에 세워진 작은 대웅전과 요사채만이 남아있는 쓸쓸한 절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낯선 느낌을 주고 있다.

연곡사 동승탑 <사진 신정일>

승탑 중의 승탑인 동승탑

대웅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두 눈에 미치는 곳 그곳에서 승탑 한 기가 있다 승탑이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그 유골을 안치한 돌탑을 말한다. “승탑 중의 승탑” 또는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승탑”이라고 불리고 있는 연곡사의 동승탑은 신라 때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도선국사의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동승탑은 8각 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은 승탑으로서 형태가 우아하고 아름답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8각 2단의 하대석이 놓이고 하단에는 운룡문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각 면에는 안상과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두겹 양련으로 연잎마다 국화 같은 꽃무늬 돋이 새겨 있다. 윗면의 탑신림대에는 각 우각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한 개씩 조각하였다.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 향로, 사천왕상 등이 조각되어 있고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모방하여 연목과 기왓골을 모각하였다. 지붕돌 끝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구멍을 나타내고 아랫 면에는 구름 문양을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편 채 날아가려는 가릉빈가 네 마리가 있지만 아쉽게도 가릉빈가는 머리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연곡사의 동부도 앞에 서서 이렇듯 아름다운 부도를 조각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돈 몇 푼 내놓고도 버젓이 자기 이름을 올리는 시대에 오로지 지극한 믿음과 정성으로 천년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그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높이 3m에 국보 5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승탑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구하다가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와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동승탑 앞 서쪽에 승탑비가 있다. 높이 13m에 보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는 승탑비는 다른 승탑비와 달리 거북 등의 양쪽에 날개가 달려있다. 이수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수와 달리 운룡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고부조의 구름무늬만으로 조식이 되어있고 정상에는 화염보주 형태를 조각해 놓았다.

<사진 신정일>

동승탑에서 북승탑에 이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150m쯤을 숨이 가쁘게 올라서면 동승탑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북승탑이 있다. 국보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승탑은 상륜부가 거의 손상이 없으며 양화와 복발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다. 연대가 다소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동승탑을 모방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북승탑에서 서쪽으로 100m쯤 내려오면 있어 서승탑이라고 불리지만 동승탑이나 북승탑과 달리 주인이 정확한 승탑이다.

탑신석 1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차육년경인”이라는 두 줄로 남아있어 소요대사가 입적한 순치 5년(1648년) 다음 해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그 문하의 4대파 가운데 한파를 이룰 만큼 유명했고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사람이다.

승탑과 탑비를 따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가 조선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예가 연곡사의 서스탑이다.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요대사 비 아래 동백나무 우거진 아래에 앞서 말한 고광순 순절비가 있고 그 아래에 비신은 없어진 채 귀부와 이수만 남은 현각선사 승탑비가 있다.

귀부 높이가 112cm, 이수 높이가 75com 보물 제152호인 이 탑비는 조각수법으로 당대의 탑비 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며 몸체에 비해 큰 귀두나 비좌 그리고 4면에 새긴 인상의 귀꽂이 특색이다. 고려 초기의 승려인 현각선사의 부도비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현각왕사비명”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 비신은 19세기 초반에 깨어졌는데 그 때에 남쪽 산이 3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

<사진 신정일>

임진왜란과 한말에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어 흩어졌던 거북조각을 모아 1970년에 한데 붙여 오늘에 이르렀다. 기품이 서린 현각선사 부도비를 지닌 연곡사에 접어들면 나말여초의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보물 제151호)이 있다.

화엄사나 쌍계사에 밀려 사람들이 찾지 않아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연곡사에도 홍매와 청매가 꽃망울으 터트리기 시작했고, 섬진강가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산수유 <사진 신정일>

“산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봄”이라고 노래한 박목월 시인의 시 구절이 강물 소리에 잠겨 흐르고 있었다.

2025년 3월 18일 쓰고 찍다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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