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녀석이 요새 나 모르게 돈을 쓰고 있네, 혹시 아빠가 돈 줬어?”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인 손자에게 몰래 용돈을 줬느냐고 묻는 것이다. 애를 버리니까 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아빠, 내 눈 똑바로 쳐다 봐.” 나는 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가 슬쩍 왼쪽 위로 향했다.
“거짓말이구나.” 딸이 결론을 내렸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것인가.
나의 뇌리에는 수많은 사랑의 눈빛들이 사진첩같이 저장되어 있다. 어머니는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항상 “데데”라고 놀렸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빛은 사랑이 담뿍 담긴 눈이었다. 어머니는 임종직전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내 팔을 쓰다듬으면서 내 눈을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눈에 담아가려는 그윽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자식을 향해, 이웃을 향해 어떤 눈빛을 보내고 있을까. 내 마음의 창인 눈에서는 어떤 빛이 흘러 나가고 있을까.
한 잡지사의 사진기자가 나를 촬영한 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가 수 많은 인물들 사진을 찍었어요. 뷰파인더를 통해 본 엄 변호사님의 눈은 황소 눈이었어요. 보기 드문 눈이예요.”
나의 인물화를 그려준 화가가 있었다. 그는 인물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리어카에 폐지를 가득 싣고 힘겹게 가는 노인의 지친 눈을 그리고, 시골 토담방 앞 툇마루에 앉아있는 노파의 짓무르고 젖은 눈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눈빛에 삶의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고 했다. 그 화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님은 두 눈빛이 달라요. 한쪽 눈은 슬프고 다른 한쪽 눈은 무서워요.”
나의 양면성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안에는 두 인격이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십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의 눈빛을 마주했다. 재판을 할 때 마음을 비우고 재판장의 눈을 보면 그가 어떤 결론을 낼 것인지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검은 법복으로 자신을 가리고 표정을 관리해도 눈빛을 속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재판장의 눈을 보고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돈이 눈에 비늘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욕심이 있으면 재판장의 눈을 통해 그 마음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범인도 그 눈이 죄를 자백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이 칼로 살해됐는데 현장에 두 명이 있었다. 둘 다 자신은 사람을 안 죽였다면서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했다. 감옥 안에서 앞에 앉은 두 사람이 나보고 그 자리에서 진범을 맞추어 보라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가면서 진지하게 살폈다. 둘의 표정은 다 ‘나는 아님’이었다. 둘 다 전과가 많았다. 표정 관리의 능력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눈동자가 자기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내면의 직감이었다. 그 눈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고 할까. 나는 그가 범인 같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법정에서도 둘 중 누가 범인인지가 문제가 됐다. 재판장은 나와는 다른 사람을 살인범으로 단정하고 판결을 선고했다.
판결이 확정되고 더 이상 변할 수 없게 되자 내가 지적했던 사람이 나를 찾아와 자기가 진범이라고 하며 악마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따금 직감이 더 맞는 묘한 체험을 하곤 한다. 도끼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살인마의 눈을 자세히 본 적이 있다. 수레바퀴 같은 홍체의 중심부인 동공 안에 커튼같이 어떤 막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커튼 뒤에 어떤 존재의 실루엣이 나를 숨어서 내다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존재가 그의 영혼 속에 들어와 있는 악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부살인범의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그의 눈에서 퍼런 불이 떨어져 나왔다. 얼어붙을 듯 기분 나쁜 빛이었다.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 그 퍼런 불빛을 보았다. 내가 겪은 작은 신비체험이라고 할까. 그들의 영혼에 숨어 들어온 파충류같은 악마의 꼬리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섭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그럴 때마다 그 앞에서 1~2초라도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서 그들을 직시하면 이번에는 그들이 푸르르 떨면서 나와 눈길을 마주치는 걸 겁내고 외면했다. 일종의 영적 싸움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