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나이 예순세살 때였다. 내가 가입했던 보험회사 직원이 연락해 왔다. 연금 타는 기간을 십년으로 할 것인지 종신으로 할 것인지 결정하라고 했다. 복잡한 설명이 덧붙여졌지만 오래 살아야 이익이 있고 빨리 죽으면 손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십년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왠지 자신이 없었다. 서가에 꽂혀있는 소송실무서적에서 기대여명을 찾아보았다. 통계학적으로 나의 남은 수명은 십이년 정도였다.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당신이 십년을 더 살면 칠십대 중반인데 그 나이면 살만큼 산 거 아니유?”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칠십대 중반을 조금 넘기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육십대 전반부에 떠나셨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의 수명도 대충 그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겠구나 생각 들었다.
암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로 갑자기 수명이 단축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별의 종착역까지 가는 시간이 십년 정도인 것 같았다. 허락받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해 보았다.
이따금씩 그렇게 죽음의 예고장을 받아보는 것도 나머지 삶을 계획하는 데 괜찮은 것 같다. 마흔다섯살 때 쓸개에 암이 있다는 의학적 통보를 받았었다. 수술 받으러 가는 날은 봄날이었다. 분당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의 양편 야산에는 수채화처럼 투명한 연두색이 풀어지고 있었다. 나뭇잎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같았다. 다시 살아난다면 내 영혼이 잠시 머무르는 이 지구별을 실컷 구경하고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술대에서 다시 살아서 일어났다. 새로 선물 받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살아있을 때 필요한 것이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중에 적빈(赤貧)에 몰려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칠 정도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그 정도의 돈은 벌 능력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오지도 가고 바다로도 흘렀다. 평택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로 가는 LNG선을 얻어 타고 갈 때가 재미있었다. 포항에서 컨테이너 수송선을 타면 네덜란드까지 간다고 했다. 친한 친구가 해운회사 사장인 덕분에 독특한 경험을 했다. 아직 감성이 남아있을 때 여행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보험회사 직원의 전화로 나머지 삶의 기간을 자각했다. 내 삶이 십년 정도 남았다고 계산하고 다시 구체적으로 뭔가를 찾기로 했다. 이번에는 천국 보험을 들어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정적인 보험료를 뭘로 하늘에 바치면 될까. 하늘에서 세상 돈이 필요 없다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하는데 그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맨날 통회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편 23편을 써서 바치기로 했다. 그냥 말로 중얼거리는 기도는 상념이 들어오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연필로 백지에 써가면서 공부하는 게 나의 버릇이었다. 숙제를 잘해 칭찬받는 초등학생같이 나는 공책에 기도를 쓰기로 했다. 처음에 천 번이 목표였는데 이천 번 삼천 번으로 초과 달성을 했다. 나의 블로그 글빵집 정다운 단골손님이 만 번을 써보라고 권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만 번을 쓸 때까지는 데려가지 않고 기다려 주실 것 같기도 했다. 천국보험은 들지만 빨리가고 싶지는 않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십년 동안에 할 보람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다. 나는 이상하게 조선시대 김시습이 마음에 든다. 잠시 벼슬을 하다가 그만두고 일생을 방랑하면서 소설도 쓰고 이천 편의 시를 남겼다. 나도 남은 인생의 여백을 수필 이천 편으로 채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년 전부터는 동해의 해변가로 내려와 살면서 매일 글을 쓰고 기도하는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인생 이별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한 시간이 다 됐는데도 나는 지금 살아있다. 나는 요즈음 매일매일을 하나님한테 덤으로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돌이켜 보니까 인생을 일정한 기간으로 나누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감명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동해로 이사가려다 가지 못한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