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길고 긴 노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아버지는 오십대 중반에 정년퇴직을 했었다. 삼십년 동안 다니던 회사였다. 퇴직한 다음 날 아버지는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출근 시간에 이렇게 집에 있으니까 이상하다.”
아버지는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수십년 다니면서 아버지는 조직의 부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퇴직한 후에 읽겠다고 평생 애지중지하던 문학전집들도 아버지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공허를 소주로 채웠다. 그리고 뒤늦게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새를 키워보려고 하다가 중풍에 걸렸다. 아버지는 노년의 시간 들을 아깝게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는 차별 없이 누구나 쫓아낸다. 그게 자연의 섭리인 것 같다. 얼마 전 삼십년 동안 기계를 조립했던 사람의 퇴직 이후의 생활을 얘기들었다. 평생 하루에 열 시간씩 소음 속에서 기계를 만지다가 퇴직을 하니까 갑자기 진공 속에 들어온 것 같더라는 것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밤이 되면 라디오를 듣는 생활 패턴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회에서 내던져지는 것은 자영업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 의식에 뿌리를 깊이 박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 있다. 늙은 양복쟁이가 비가 오는 정원을 망연히 바라보며 있었다. 양복을 짓고 싶어도 더 이상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세월이 그를 밀어낸 것이다.
천직이라고 생각한 나의 변호사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미리 생각했었다. 하얗게 남은 여백을 어떤 색깔로 채워 넣어야 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내 나이 육십세가 됐을 때였다. 언론인 출신 칠십대 선배 두 분에게 여생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지 물었다. 두분 다 괜찮은 복받은 인생을 산 것 같았다. 한 분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좋은 학교를 나오고 기자로 들어가 편집국장과 사장을 지냈다. 다른 한 분은 기자로 시작했다가 행정관료로 들어가 차관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들의 만년은 어떤 색깔로 채우는지 궁금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풍류를 즐겼지. 오락 잡기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했지. 마작을 하면서 늙어가고 싶구만. 돈도 많이 썼지. 돈은 모으는 게 아니라 나누어야 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쓰고 가는 게 멋지게 사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야. 타인과 나누면 그 이상으로 보상이 돌아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렇게 되기도 하지.”
그에게 뭘 부탁했을 때 거절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게 주위의 평가였다. 그는 늙어서 돈이 다 떨어졌는데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가 진짜 부자가 아닐까. 벌어도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엄 변호사라고 하면 특정 분야를 잡아 글을 쓰는 데 올인 할 거야. 일반 기자들보다 법조계 내부에 대해 훨씬 깊숙이 알잖아? 심도 있게 써서 블로그 같은 데 고정적으로 올리면 언론들이 받을 거야. 변호사는 만명이 넘지만 엄 변호사같이 글 쓰는 사람은 소수잖아?”
그는 내가 노년에 놀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작이나 오락잡기도 젊어서 공을 들이고 시간을 써야지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잘하는 걸 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매일 같이 연락하는 친구가 둘이 있어. 그리고 일주일에 세번 가량은 당구를 쳐. 그리고 간간이 공부를 하는 데 그것도 즐거움을 얻는 길이지. 나와 친구인 변호사가 있어. 매일 같이 자기 사무실로 나와서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마작을 하고 있어. 그 친구는 이제 자기 사무실로 놀러 나오는 거지 뭐.”
노년의 시간을 보내는 데 오락 잡기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젊어서 배워두지 못한 게 아쉬웠다.
“늙어서의 외로움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내가 두 선배에게 물었다. 한 선배가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 내남 없이 늙으면 제일 힘드는 게 외로움이지. 그래서 여자친구도 만들려고 하고 남자끼리 모임을 만들어 만나기도 하지. 탑골공원에 나와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있다가 돌아가는 노인들도 외로움 때문에 그 장소에 모여드는 게 아닐까. 고독은 스스로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고 봐. 외롭다고 여기저기 전화질 할 필요가 없어.”
노년의 시간이 풍요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자기에게 알맞는 놀이 같은 일을 발견하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그 연습을 해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