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장은 증거로 공문서만을 요구했다. 핵폭탄이 떨어진 나라였다. 도쿄는 잿더미가 됐는데 그런 문서가 남아 있을까. 신철식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얼굴이 어두웠다. “일본에서 뭐 찾았어?” 내가 물었다. “없어.”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일본에 있는 아버지 인맥을 총동원해서 일본 정부 기록보존소를 다 뒤졌어. 그런데도 없어.” “당시 폭격이 심했는데 불타버린 것 아닐까?” “그래도 나는 어딘가에는 있다고 생각해. 일본은 기록을 생명처럼 여기는 나라니까. 불탔다면 어떤 서류가 불탔다는 기록이라도 있어야 해.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에 대한 자료만 전혀 없단 말이야.”
의문이었다. 해방될 때까지 그냥 근무했던 것 아닐까.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신철식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여러 번 그 말씀을 하셨어.” 신철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내가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나는 군수성에 부임하지 않았다. 나는 제국주의를 반대했다’고 하셨어. 나는 그 진실을 의심하지 않아.” 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서운함인지도 몰랐다.
일주일 뒤 법정이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측 연구원과 변호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연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가방에서 두꺼운 파일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친일 관련 인물 4700명의 행적 자료입니다. 우리가 10년 동안 모은 겁니다.” 그가 파일을 펼치자 빼곡한 이름들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조선 청년들을 징용 보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습니다.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해방 후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잘살게 됐습니다. 그 자손들은 지금도 사회 상층부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신현확 씨와는 다른 경우 아닙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연구원이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예외를 두는 순간 기준이 무너집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일제 고급 관료였으면 친일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10·26 당시 김재규와 맞섰던 부총리 신현확은 무엇입니까? 12·12 때 탱크 앞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신현확은 어떤 존재입니까?” “1979년? 1980년? 그게 1943년의 일본 관료 경력을 지웁니까?”
답답했다. “그 반대로, 1943년만으로 그의 전 생애를 규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닙니다. 나중에 잘했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그럼 과거가 이후의 삶 전체를 지워버려도 되는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연구원이 다시 강조했다. “원칙이 사람까지 지워도 됩니까?” “개인의 사정을 일일이 봐주면 친일 청산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구조’를 보는 겁니다.” “구조요?” “네. 일제강점기라는 구조 말입니다. 그 구조에 참여한 사람은 친일파입니다. 개인의 의도나 이후 행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념에 찬 그의 눈을 바라봤다. 어딘가 섬뜩했다. “그렇다면 당시 엘리트들은 모두 친일파입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일제의 교육 제도를 이용했으니까요.” “그 논리라면 그 시대를 산 조선인 전체가 친일파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관직에 들어간 사람들을 적극 협력자로 보는 겁니다.”
그들은 ‘구조’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지우고 있었다. 연구원이 다시 말했다. “신현확의 행위는 단순한 친일을 넘어 국제범죄에 협력한 것입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신현확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군수 체계를 담당한 군수관이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신현확은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기억하는 이완용보다 국제사회에 더 큰 피해를 끼친 셈입니다.” 순간 숨이 막혔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겁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서 민족문제연구소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현확 씨가 군수관으로 임명됐다는 일본 정부 문서를 증거로 제출할 예정입니다. 현재 연구소 자원봉사자들이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확인사살을 예고하는 듯한 말이었다.
법정을 나서며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정의가 충돌하고 있었다. ‘구조’와 ‘개인’. ‘원칙’과 ‘진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들에게 신현확이라는 한 인간의 수고와 고뇌는 어떤 의미일까.
그날 밤,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책상 위에는 신현확 관련 자료들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 신문 스크랩. 증언서. 하지만 판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공문서.’ 없었다.
재판은 일주일 뒤 다시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는 질 것이다. 증거 없이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1979년 그날 밤. 1980년 그 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나는 다시 자료를 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