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어지러운 세상…그래도 친구가 있어서”

중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동네 친구 세 명이 있었다.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죽고 못 살았다. 그런데 우리 네 명의 구성이 묘했다. 두 명은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리고 두 명은 가난한 집이었다고 할까. 부잣집 중 한 집은 아버지가 섬유로 부자가 된 사업가였고 다른 한 집은 아버지가 공대학장이고 특수기술을 발명해서 기업들의 대접을 받았다. 부잣집 아이 두 명은 우리들이 부러워하던 정원에 목련이 하얀 양옥집에 살았다. 제일 가난한 아이는 산동네 판자 집에 살았다. 우리 집은 낡은 왜식 목조가옥에 살았으니까 그 중간쯤이라고 할까.
다니던 중고등학교도 달랐다. 우리들은 집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관계없이 친했다. 영원히 우정이 변치 말자고 하면서 은반지를 네 개 만들어 나누어 끼기도 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지어졌다. 우리 중에 제일 부잣집 아이가 강남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우리들은 그 아파트를 구경하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재래식 화장실에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도는 가난한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고시원 쪽방에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부터 그들과 멀어지게 됐다. 친구들도 군대를 가기도 하고 회사에 들어가기도 하고 이민을 가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따금씩 바람결에 친구들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판자집에 살던 우리 중 리더역할을 하던 친구는 가족을 데리고 홍콩으로 가서 거기서 무역업을 한다고 했다. 성공을 한 그가 나를 홍콩으로 초청을 했다. 그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그는 자신의 고생담을 털어놓았다. 이런 얘기가 지금도 기억의 기슭에 남아있다.
“샘플을 들고 구룡의 뒷골목 중국인 가게마다 문을 두드렸지. 수없이 거절당하고 쫓겨나기도 했어. 중국인들은 한번 관계를 맺은 사람하고 끝까지 가지 도중에 인연을 바꾸지 않거든. 그걸 뚫어야 했던 거야. 정말 힘이 들었어.”
그는 어린 시절 하루 세끼 밥 걱정 없고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하던 다른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가난에서 오는 상처가 치유된 것 같았다.
다시 세월이 흘러 우리가 오십대를 넘긴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연히 우리 중 제일 부잣집 아들이었던 친구가 빌딩 관리원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보고 싶기도 하고 마음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가 어떤 마음일지 몰라 망설이다가 찾아갔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빈부를 의식하지 않고 우정을 맺어온 관계였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근처의 음식점으로 가서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강화도쪽 해병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상익이 네가 고시 공부를 하다가 찾아왔었지. 그때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찾아왔겠냐? 지금도 그때 네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가 본 나의 모습인 것 같았다. 나도 그가 군대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털털거리면서 그의 부대를 찾아갔다. 나는 그가 외롭고 힘들게 군대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는 고시원 쪽방에서 공부하는 내가 외롭고 힘들게 보였던 것 같다. 소주가 든 술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에 그의 신세 타령이 나왔다.
“나는 지금 젊은 사장님이 가지고 있는 강남의 빌딩을 관리하고 있다. 애비한테서 물려받은 엄청난 돈만 있는 젊은 친구지. 우리 아버지도 잘났고 부자셨지. 아버지가 나한테 한강변의 땅을 사서 공장까지 차려줬으니까. 세상은 돌고 도는 것 같아. 가난한 판자집 아들은 성공하고 부잣집 아들이었던 나는 이렇게 됐으니까 말이야. 나는 세상살이가 고달팠어. 아버지가 하라는 공장을 하지 않고 회사에 들어갔지. 공장 땅만 가지고 있었어도 부자였을텐데 말이야. 내가 들어간 회사가 부도가 나더라구. 나는 백수가 됐지. 다시 뭘 시작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어. 내가 집에 있으면 아내가 불안해하는 거야. 하루 종일 공원 벤치에서 새우깡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신세가 됐어. 그러다가 간신히 빌딩 관리를 하는 자리를 얻었지. 너 온 길에 우리 젊은 사장한테 인사를 해 주면 안 되겠어? 나도 이런 유명한 친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게 말이야.”
소년시절부터 우리의 살아온 모습이 시대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던 시절 유행했던 가수 조영남의 노래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같이 우리의 삶은 변했다.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가난했던 친구가 부자가 되기도 했다. 옛날부터 세상에는 차별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가난한 마리아의 아들 목수 예수가 아닌가?’라고 했다. 돈과 가문 직업으로 사람을 평가했다. 그런 것들이 인간에게 씌워져 있는 검은 안대 같은 게 아닐까. 그렇지만 우리들은 빈부나 가문, 직업을 가지고 우정을 저울질하지는 않았다. 그냥 친구가 좋았고 인간이 좋았다. 소년 시절의 추웠던 겨울밤을 떠올리면서 그 우정을 평생 계속하고 싶다.
며칠 전 책장에 꽂혀있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에서 검은 교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나를 봤다. 사진 속의 그와 지금의 나는 동일 인물일까?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 같이 울고 웃던 친구들과 지금의 그들은 같은 존재일까? 잘 모르겠다. 노인이 되어 인생의 몇몇 페이지를 반추하고 재해석해 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