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

변칙에 입을 닫으면 정의로운 사람들이 쓰레기로 포장되어 고문 당하고 죽을 수 있었다. 이웃에 강도가 들면 소리라도 쳐 줘야 하는 세상이어야 한다. 적어도 세상에 그런 사실은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게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가 아닐까.

수감 중인 죄수로부터 국가 살인을 얘기 들었다. 그 죄수는 자기의 일처럼 결사적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제가 변호사님을 보고 싶었던 건 석방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감옥에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전 어떻게든 그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전 배운 것도 없고 말재주도 없어요. 알리려고 나름대로 인질 난동을 부리고 기자를 불러오라고 해도 안됐습니다. 꼭 해주십시오.”

그는 눈물까지 흘렸다.

“죽을 때까지 감옥에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의미가 뭐죠?”

나는 그의 속을 알고 싶었다. “저는 어려서는 거지고 아이 때부터 도둑질을 하고 평생 감옥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죽는 표본이 되는 거죠. 세상 사람들에게 ‘저렇게 살면 안 돼’ 하는 도덕적 샘플이 되는 게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지면서 그 사건에 집착했다. 나는 일단 그가 말한 사실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친한 교도관을 통해 죽은 사람이 감옥에 있을 때 같이 징역을 살던 사람들의 명단을 얻었다. 아는 경찰관들을 통해 주민조회를 해서 그들이 어디 사는지를 알아냈다. 죽은 사람 가족의 소재도 알아냈다. 형이 지방도시의 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당시 한 기자가 추적을 하다가 벽에 부딪쳐 세상에 발표되지 못한 사실도 알게 됐다. 그들을 통해 내가 알아낸 내용은 대충 이랬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송에 특별교도소가 생겼다. 사회의 쓰레기를 분리해서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다. 인간쓰레기들은 때려죽여도 된다는 분위기가 저변에 퍼져 있었다. 그곳은 한국판 아우슈비츠였다. 그 살벌한 교도소 안에 ‘감옥 안의 감옥’이 또 있었다. 독종들을 따로 처리하는 곳이었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게 하고 꽁꽁 묶은 상태에서 엎드려 밥을 핥아 먹게 했다. 거기서도 저항하는 인물이 있었다. 당국은 본때를 보이기 위해 그중 한 명을 잔인하게 때려죽였다. 죽은 사람은 심장마비로 처리되어 교도소 근처의 야산에 묻혔다. 시골의사는 맞아서 온몸에 시퍼렇게 든 멍을 외면한 것 같았다. 담당 검사는 현장을 보지도 않고 매장 처리하라고 서류로 지시한 것 같았다. 당시 그곳에 근무했던 교도소 간부를 만났다. 그는 공적으로 증인이 될 수는 없지만 사적으로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했다.

인간쓰레기는 그렇게 죽여도 되는 것일까. 당시 군사정권은 사회의 쓰레기들을 치워 세상을 깨끗하게 만든다면서 사회보호법을 만들고 삼청교육을 실시했다. 사회보호법은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에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도 처리할 수 있게 규정했다. 보호감호라는 명분하에 간판만 바꾼 교도소에 가두어 둘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 무렵 법무장교였던 나는 삼청교육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고로 죽었다는 헌병대의 보고가 수시로 올라오는데 믿을 수 없었다. 직접 가서 시신을 확인해 보면 전신에 잉크 빛 멍이 들어 있었다. 맞아 죽은 것이다. 국가는 어떤 명분이라도 사람을 때려죽일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건 민주국가가 아니다.

사회보호법은 법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 범죄인일 수 있다.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일까. 자신만이 정의를 독점하고 남을 처단할 수 있는 건 악령이라고 토스토엡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말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숙청이 그렇고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이 그랬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반대자를 말살하는 도구로 악용할 위험성이 있었다. 당시 정권에서는 운동권을 끝까지 추적해서 말살하려는 법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그런 법을 만들어 적군파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다 죽여버렸다고 했다. 운동권 출신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들 정권에 의해 전두환은 땅속에 제대로 묻히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우연한 길목에 맞딱드려 있었다. 한 인간의 의문사로 사회적 문제로 할 것인지 적당히 외면하면서 보통의 변호사로서의 안정된 길을 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민주시민이라면 옆에서 누가 맞아 죽는데 침묵하는 비겁자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칙에 입을 닫으면 정의로운 사람들이 쓰레기로 포장되어 고문 당하고 죽을 수 있었다. 이웃에 강도가 들면 소리라도 쳐 줘야 하는 세상이어야 한다. 적어도 세상에 그런 사실은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게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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