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존엄사법…”편안하고 의연하게 죽을 권리”

국가도 관념적 위선의 명분보다 노인들이 편하게 갈 수 있는 법적 선택의 통로를 마련해 줘도 되지 않을까.

국회에 계류되었던 존엄사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존엄사의 선택은 철저히 본인의 자유다. 의사나 가족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신청을 했어도 언제든지 그 뜻을 철회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죽지 못하고 온몸에 주렁주렁 줄을 매달고 병원에서 고통을 받다가 외롭게 죽어갔다. 어차피 살지 못할 것이라면 편안하고 의연하게 죽을 권리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인들의 증가는 장래 젊은이들의 부담이고 국가의 짐이기도 하다. 적정한 시기에 죽어주는 것은 미래의 세대와 나라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정부는 저세상으로 가는 노인들의 죽음을 복지 차원에서 다루기로 했다. 75세 이상의 노인이 주민센터에 신청하면 친절하게 절차를 밟아준다. 노인들이 마지막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돈도 지급한다. 뿐만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 위로해 줄 봉사자들을 붙여 노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뜻하게 해주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일본 영화 <플랜 75>에 나오는 존엄사법이 통과된 시대적 정책적 배경이었다. 

법이 통과된 일본의 현실이 화면에 흐르고 있었다. 호텔에서 청소를 하던 78세 여성이 존엄사를 신청했다. 일을 하던 노인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호텔측은 고령자들을 다 해고했다. 혼자 살던 고령 여성의 일자리는 더이상 없었다. 삶이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방에서 고독사 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 여성은 정부가 지원하는 편안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혼자 살던 집을 청소하고 살림들을 정리했다. 죽음의 장소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차창으로 흘러가는 산과 들이 무심히 보인다. 마지막 죽음의 장소는 야트막한 언덕에 서 있는 장방형 건물의 자그마한 병원이었다. 병원의 2층쯤에는 적막감이 감도는 공간 안에 침대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옆의 침대와 사이에는 차단커튼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죽음의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직원이 주는 알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산소마스크를 쓰면 됐다. 잠시 후 스르르 잠이 오면서 무의식의 암흑세계로 건너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때 옆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린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옆 침대에는 남자 노인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그 죽음의 대합실을 조용히 걸어 나왔다. 아름답고 선명한 노을을 배경으로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노인인 그녀는 어딘가를 향해 가면서 영화가 끝이 났다. 존엄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깊은 의미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나는 지난 2년간 실버타운에 있었다. 90대의 한 노인은 저승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대합실이라고 그곳을 표현했다. 망각과 완만한 죽음이 지배하는 외진 곳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실버타운의 로비에서 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했다는 70대 후반의 노인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서울법대 재학 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됐죠. 일생을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다가 문을 닫게 됐죠. 하늘로 오라는 초대장을 받았기 때문이죠. 암을 선고받고 수술을 받았는데 몸무게가 무섭게 빠지면서 지금 뼈만 남아 있어요. 이제 남은 숙제는 어떻게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편안하게 죽느냐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존엄성을 가지고 죽는 법이 통과되지를 않았어요.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나 얘기를 했는데 아편 한 덩어리를 먹으면 고통없이 갈 수 있다고 합디다. 의외로 구하기가 아주 어렵지도 않다고 그래요.”

그는 미남에 사회적인 굵직한 사건들을 처리한 검사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었다. 병에 풍화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현명한 노인들은 죽음의 방법들을 나름대로 강구하고 있는 것 같다. 실버타운에는 밧줄을 준비했다는 분도 있었고 약학박사 출신은 프로포플이나 데메롤 같은 약품을 구해 용량을 높이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인들에게 죽음은 더이상 무겁지 않았다. 그들에게 죽음은 가벼웠고 이 방에서 저방으로 옮겨가야 하는 방 같기도 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삶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국가도 관념적 위선의 명분보다 노인들이 편하게 갈 수 있는 법적 선택의 통로를 마련해 줘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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