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늙은이는 혐오 대상인가?…그래도 공짜지하철은 미안하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서울 거리가 온통 파헤쳐지고 흙덩어리들이 도로에 산같이 쌓여 있었다. 지하철공사 때문이었다. 시내를 다니는 낡은 버스는 흙더미 사이로 곡예운전을 하며 지나갔다. 종로 거리의 상점들은 문 앞의 거대한 싱크홀 같은 구덩이 때문에 손님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고 울상이었다.
30대 무렵이었다. 공무원인 친구가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하철공사를 위해 외국에서 돈을 꾸어 오는데 언제 그 돈을 다 갚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세대가 그런 빚을 다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을 만드는 데 불편함을 참고 돈을 벌어 힘을 보탠 우리 세대에게 작은 선물이 주어졌다. 만 65세가 넘으면 지하철을 공짜로 타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건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땀을 흘린 우리 세대에 대한 사회적 인정인 것 같아 가슴이 흐뭇했다.
그러나 공짜라는데서 오는 미안함과 불편함이 있다. 지하철을 타면 일반좌석 앞에는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피곤에 쩌든 젊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서다. 공짜로 탔는데 남의 자리를 양보받으면 염치가 없을 것 같았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기도 눈치가 보였다. 경로석이 차면 서있을 자리도 부족했다. 경로석 앞이거나 출입문 옆의 작은 공간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어깨에 배달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알바를 하는 노인들을 보면 국가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짜 지하철은 가난한 노인들이 일할 수 있게 해주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긴 하루를 공원에서 보내는 노인들도 공짜지하철 혜택이 없으면 골방에서 외로움에 젖어있을 수밖에 없다.
영원한 것같던 젊음이 어느순간 증발해 버리고 우리들은 모두 노인이 됐다. 우리들에게 아버지 세대는 어르신이었다. 존경하고 복종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그런 어르신이 아니다. 노인은 추하고 둔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에이지즘’이 우리세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경로석이라 불리던 자리 위에 붙은 이런 글씨를 본 적이 있다.
‘이곳은 노인만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구석의 자리를 전유물로 아는 이기적인 노인들의 추태가 그 원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글의 행간에서 노인들에 대한 혐오와 거부반응의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어느날 교대역 지하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계단 아래 앉아서 구걸을 하는 여자 노인이 절규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보고 젊어서 뭐했길래 늙어 그 신세냐고 그래요. 야 이년아 너도 늙어서 나같이 돼라.”
돌과 돌이 부딪치는 것 같은 늙음과 젊음의 충돌이었다.
젊은이들의 나라와 늙은이들의 나라가 분리가 되고 마찰음이 일어나는 것 같다.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한 정당의 젊은 대표가 노인들이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제도를 없애버리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의 최고 명문대를 나왔다는 반짝거리는 젊은 정치인이다. 그는 젊은이들의 전격적인 호응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나는 문득 불안을 느낀다.
젊은이들의 불행이 짐이 되는 늙은이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일본에서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안락사를 장려하고 정부에서 지원금까지 준다는 영화가 흥행이 됐다. 늙으면 이제 가셔도 된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이라도 우수한 존재만 살아남아야 한다면서 사회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고령화사회에서 노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 세대가 낸 세금으로 지하철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노인들이 공짜로 지하철을 탄다고 눈치를 주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우리의 신세를 진 건 아닐까. 우리 세대가 땀 흘려 번 돈으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짜 밥을 먹게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왜 우리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왜 돈 없는 늙은이들은 도심속에서 쓰레기같은 존재가 되어 주눅이 들어 있어야 할까.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고 했는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늙으면 서러워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