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일흔살 컴맹의 스마트폰 완전정복 ‘도전기’
지하철을 타 보면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전부 스마트 폰을 들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다. 스마트 폰을 보다가 자라목이 된 사람도 있다. 나는 이상하게 거부반응이 일어나 스마트 폰에 무심했다. 다른 사람이 스마트 폰의 매뉴얼을 익힐 때 작은 원고지를 제본해 만든 공책에 쓴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익히려고 마음먹었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시대를 따라가는 젊은이들의 문화가 있다면 좋은 것을 지키려는 노인들 모습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서예를 한다든지 바둑을 즐긴다든지 시를 쓴다던지 그런 것이었다. 어쩌면 복잡한 기계를 따라가기 골치 아픈 자기합리화가 섞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컴맹이 되어 버렸다. IT 세상에서 그건 거의 장애인이 된다는 걸 느꼈다. 2년전쯤이다. 소설가 김훈씨와 저녁을 먹고 휴대전화로 간단한 메시지 하나를 전할 필요가 있을 때였다. 나는 조작방법을 몰라 허둥댔다. 김훈씨는 자기 정도 컴맹이 또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묵호부근으로 놀러온 친구가 서울을 가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몇초만에 기차표를 사고 좌석 배정까지 받는 걸 봤다. 며칠 후 나는 기차로 서울을 가야 하는데 고민했다. 혹시나 작은 역에 기차표를 파는 직원이 없을까 해서였다. 이미 기차표를 사람에게 제시하고 타는 시대가 오래전에 지나갔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게을렀다가는 사방이 현대의 전자기술의 벽으로 막힌 속에 갇혀서 질식할 것 같다. 식당에서 음식 주문도 아이패드 조작에 걸려 할 수 없다. 스마트 폰으로 택시를 부르지 못하면 한 없이 길거리에서 차를 기다려야 한다. 편지나 서류를 보내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 민원신청도 제대로 못한다.
얼마 전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이런 글을 보내왔다.
“저의 삶을 공감하시려면 한번 두손 두발을 다 묶고 입을 테이프로 붙인 채 누워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제가 육십년 동안 살아온 삶입니다.”
뇌성마비장애를 앓는 그 여성은 전신마비다. 혼자서 먹을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는 처지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손가락 하나다. 그녀는 그 손가락으로 카톡을 통해 내게 글을 보내왔다. 그녀의 의지는 놀라웠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를 보고 사회를 보고 한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러 시를 만들고 컬럼까지 쓰고 있다.
스마트 폰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등잔같이 현대인에게 모든 걸 해결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 만든 장애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씩 야금야금 배우기로 했다. 급하게 많은 지식을 탐했다가는 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번에 용어의 벽에 걸릴 게 뻔했다. 아침 화장실에 갈 때 하루에 한 개의 버튼 조작법만 배우자고 계획했다. 옛날 생각을 하고 서점에 갔더니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정년퇴직한 친구가 유튜브는 뭐든지 알려준다고 했다. 자기는 그걸 보면서 지난 일년 동안 중국요리를 공부했는데 이제 상당한 수준으로 올랐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유튜브에서 스마트폰 사용법을 찾아봤더니 좋은 강의가 무궁무진하다. 십여분 되는 분량도 길었다. 그걸 1/3씩 잘라 화장실에서 무심히 봤다. 버튼 작동 하나만 배우자는 것이다. 어제는 무심히 스마트폰의 화면에 투병한 빗방울이 매달린 유리창에 나왔다. 거리의 불빛이 비쳐 보석같이 빛나는 느낌이었다. 그 사진 위에 간단히 글을 써 보라고 했다.
그러다가 무심히 버튼 하나를 잘못 눌렀다. 그랬더니 이 사진이 엉뚱하게 매일 글을 발표하는 블로그 앞에 올라앉는 것이었다. 삭제하려다가 생각하니 촉촉함이나 정이 담긴 사진을 함께 나누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가 노년에 할 또 다른 세계를 펼친 느낌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진 속에 삶이 담겨있는 짧은 말이나 시를 넣어서 함께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아침도 컴맹장애를 벗어나기 위해 버튼 하나를 조작해 봤다. 복잡한 외국어가 마법의 렌즈를 대는 순간 한글로 바뀌는 것이다. 참 신기한 세상이다. 나이를 먹어도 갈 수 있는데까지 따라가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