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삼국지] 포니차 디자이너 ‘주지아로’
무역 1조 달러 시대 ③?
‘무역세대 소통 한마당’이 시작됐다. 우리는 내 얼굴이 계속 비춰지는 배경화면을 향해 붉은 카펫 위를 위풍당당하게 행진했고 무대 밑에서 미래의 무역역군인 대학생들이 우리 목에 꽃다발을 걸어준 뒤 단상으로 이끌어 가는 순서였다. 팡파르가 울리고 플래시가 터지고, 우리는 구름 위에 떠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이탈디자인 주지아로>사의 지오르게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 회장 옆에 내 자리가 마련됐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주지아로는 아름다운 포니자동차와 연관되어 내게는 꿈같은 이름이었다.
한국이 처음 자동차산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미국의 GM이나 포드자동차로부터 말할 수 없는 업신여김과 시달림을 받았다. 그들의 부품을 받아서 조립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출할 생각 말고 한국에서만 팔라’고 했다. 부속 하나 설계할 생각을 못하게 했다. 그것은 자동차생산 동반자가 아니고 자동차 식민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그였다. 그는 아름다운 포니를 설계하여 전 세계에 한국산 자동차가 굴러다니게 한 사람이었다. 포니는 유럽에서 아주 인기 있던 ‘파사트’의 축소판이었다. 폭스바겐사의 ‘딱정벌레’ 후속으로 나온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이었던 ‘파사트’ 설계자인 그는 현대의 요구에 따라 ‘포니’를 설계했다.
1970년대 말, 배를 팔겠다고 나이지리아에 가면 코리아는 몰라도 포니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 뒤 현대와 대우자동차에서 생산한 많은 자동차를 설계했다. 그러나 내게 그는 언제나 포니의 아버지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인 페라리를 설계했을 뿐 아니라 니콘의 카메라도 설계했고 애플의 컴퓨터원형도, 심지어는 ‘Marille’이라는 이태리 파스타도 설계했다고 한다. 설계라는 설계는 다한 셈이었다.
그는 얼굴이 주름투성이였고 머리는 호호백발인 잘 웃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이탈디자인 주지아로>사의 젊은 중역이 뒤에 서서 영어로 통역을 했다.
“회장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는 그저 웃으며 누구냐고 물었다. “지오르게토 주지아로 씨예요” 그는 껄껄 웃으며 “me too, me too”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영어였지만, 한국정부로부터 자신의 공로가 인정되어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기쁨이었다는 그 나름대로의 표현이었다.
“지금도 자동차를 설계하고 계세요?” “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인 걸!” “도대체 자동차 설계는 몇 대나 하셨어요?” 그는 그의 통역과 의논하였다. “지금까지 아마 480개 넘는 모델을 설계했어요. 아직도 세계 40여 개 일류 자동차 회사에 설계를 공급하고 있어요.”
그는 나를 계속 ‘젊은이’라고 불렀다. “지금 몇 살이세요?” “1938년생이지. 이젠 늙었어.” “나는 몇 살로 보이세요?” “한 쉰다섯쯤 될까?” “39년생이에요. 회장님보다 한 살 아래에요” 그는 내 어깨를 치며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의 순진한 웃음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나를 젊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무역협회장의 인사가 끝나고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그는 수출을 위해 헌신한 현장 작업자들에게 무역 1조 달러?달성의 공을 돌렸다. 그리고 훈포장 수여식이 시작됐다.
*<무역 1조 달러 시대 ④>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