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삼국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단상
무역 1조 달러 시대 ④
단상에서 무역 1조 달러 달성 특별유공자 31명이 세 줄로 늘어섰다. 첫 줄에는 훈장을 받을 사람들, 둘째와 셋째 줄에는 포장과 표창장을 받을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대통령은 앤드류 던컨부터 훈장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해운회사의 하급 중역이었던 던컨의 아들에게 금탑산업훈장이 주어졌다. 포항제철 초기에 큰 공로를 세운 아리가 토시히로 신일본제철 감사역의 나이든 미망인에게 동탑훈장이 주어졌다.
그리고 천하의 주지아로 회장에게 철탑훈장이 주어졌다. 훈장의 등급으로만 봐도 한국정부가 실무자에게 쏟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반갑게 주지아로 회장과 악수했다.
“주지아로 회장이시죠?” 주지아로 회장은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이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 다음 다음이 나였다. 나는 이 대통령이 내게 어떤 표정으로 다가올까, 무슨 말을 걸어올까, 내게 크게 웃어줄까, 여러 가지로 상상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화답할까 궁리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끝났다. 주지아로 다음부터 대통령은 웃음을 싹 거두었고 내게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섭섭해 할 틈도 없이?석탑훈장은 내 왼쪽 가슴에 달렸고 대통령은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가 내게 웃음을 보여주지 않았거나 아는 체하지 않았다는데 대한 섭섭함 보다는 약간 지친 듯한 얼굴과 그의 굽은 윗몸이 더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래 꼿꼿한 사람이었다. 근육질은 아니지만 빳빳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 집무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절대다수 국민들의 지지가 그의 몸을 더욱 바짝 일으켜 세워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의외의 짐이 그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눈과 귀와 뇌를 떼어놓은 사람들의 무거운 손가락과 우악한 입이 그의 어깨에 크나큰 짐으로 얹힌 것이다.
그의 4년은 외교적으로나 경제적 성과로 보나?업적이 넘쳤다. 국격을 높였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국토가 균형을 잡고 개발됐고, 해외사업개발도 눈부셨다. 전 세계 은행들이 문을 닫을 형편이었지만 우리나라만 돈이 제대로 유통되는 나라로 남았다. 수많은 나라들의 국가위상이 떨어지는 동안 한국은 외교적으로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하나씩 세워 나갔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탄탄한 나라, 존경받는 나라가 됐다. 그에게 손가락질하는 누구보다 그는 오래 역사에 남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칭찬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못난 사람들. 그에게 손가락질하고 냉소하고 핀잔을 주는 것이 잘난 사람들의 표상인 것처럼 호도됐다.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풍요는 지난 40여 년간 우리 모두의 피와 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이뤄졌다.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오랜 시간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것은 짧은 기간에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국부를 이룩하기 위해 땀 한 방울 흘려 보지 않은, 손에 기름때 한 점 묻혀 보지 않은, 나라를 지탱하기 위해 세금 한 푼 내보지 않은 사람들의 남루한 혀끝으로, 진실된 노력은 왜곡되고 국부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일도, 국가의 기본을 세워나가는 것도, 후손을 위해 물려줘야 할 나라의 미래도 그들의 안중에는 없다. 경험과 지식은 무식과 편견에 짓밟힌다. 법을 어기는 것이 자랑이 되고, 법을 만드는 사람들,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앞서 법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
일생을 관류하는 그의 꼿꼿한 기본적인 가치관이 불합리에 억눌리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는 둘째 줄, 셋째 줄을 돌며 포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성을 다해 빌었다. 그가 거기 있는 동안,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 세상이 이뤄지기를, 고귀한 기본이 존중받는 사회가 자리잡기를, 균형 잡힌 가치관이 이끌어가는 나라가 확립되기를 기도했다.
이제 남은 짧은 일 년 동안, 옆과 뒤 기웃거리지 않고, 허튼 손가락질에 신경 쓰지 않고, 쓸모없는 험담에 귀 기울이지 않고, 후세에 남겨줄 확고한 법과 질서가 이 나라에 자리 잡히도록 헌신하기를, 헌신할 힘이 그와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千福을 天福으로 여기며
돌아오는 길, 차 속에서 아내는 말했다. “거봐요. 내가 천복(天福)이라고 했잖아요.”
나는 조선학회지에 오랫동안 칼럼을 쓰고 있었다. 2011년 4월호에 천복지상(千福之相)이란 칼럼을 실었다. 대학시절, 절의 골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내 얼굴을 보고 “천복이 실렸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것을 千福이라 지레 해석을 하고 나의 인생이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자조하며, 그런 정도에서 자족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내는 스님이 千福이라 했을 리 없고 天福이라 했을 거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님의 안목이 정말 옳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