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나일강기행] ④ “이집트도, 아프리카도 아닌 ‘누비아인'”
*’황성혁의 조선(造船)삼국지’와 ‘인도기행’, ‘조선사(造船史)’를 연재했던 황화상사 황성혁 대표이사가 이번에는 이집트 ‘나일강’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이집트를 남북으로 흘러 내리며 찬란한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던 나일강은 20년 전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시아엔(The AsiaN)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시기 바랍니다.
1994년 6월13일(월)
새벽 4시. 일어나서 호텔 체크아웃하고 카이로 공항으로 향했다. 7시에 MS0431에 탑승 오전 9시 아스완 (Aswan)에 도착했다.
아스완 하이댐 (Aswan High Dam)으로 직행. 아스완은 예로부터 수단을 비롯한 아프리카 남쪽의 나라들로부터 주요 산물을 Nile강을 따라 배를 이용하거나, 낙타의 등에 실어 이집트로 나르던 무역거래의 요충지였다. 나일강은 범람함으로서 강 유역을 비옥하게 했지만 주민에게 큰 재앙을 주어 정착을 방해하기도 했었다. 나일강의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댐의 건설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시도되었다. 가장 적절한 장소가 아스완이었다. 1889~1902년에 댐을 건설했으나 나일강의 거대한 수량을 조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1960년에 다시 착공 1971년 완공한 것이 아스완 하이댐이었다.
높이 111 미터 제방길이 3.6 키로미터 저수량 1570억 톤이라고 했다. 소양강댐의 27억 톤과 비교하면 엄청난 세기적인 역사였다. 저수지는 망망대해였다. 그 대해 밑에 얼마나 많은 문화재들이 수장되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세계의 착한 돈과 기술이 합쳐 몇 개의 괄목할만한 인류의 유산은 구해내었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아부심멜 신전이다. 기원전 13세기에 연안절벽을 파서 만들었다는 인간이 조성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창작품 중 하나이다. 절벽에 높이 20 미터 넓이 60 미터의 규모로 파놓은 신전이었는데 그 바위들을 이삼십톤의 블록으로 잘라 저수지의 수면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 다시 조립해 놓았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는 아부심멜 신전 방문일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언젠가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었지만 하도 많은 포스터들을 보아 마치 다녀 오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스완은 남의 돈을 가져와 이루었다고 하지만 이집트 고대유적의 스케일과 비견할 수 있는 현대 건설사업의 기념탑이다. 아스완댐은 나일강의 제이의 발원이다. 뜨거운 사막을 다스리고 식히며 모든 생명들을 거느리는 생명의 젖줄이다. 빅토리아 호수로부터 머나먼 길을 달려온 나일강은 아스완에서 잠깐 숨을 몰아 쉰다. 그리고 지중해까지의 멀고 험한 길을 준비한다. 댐에서 쏟아진 뒤 나일강의 수심은 50 미터라고 했다. 깊고 넓은 물줄기가 유장하게 세월과 세상을 다스리며 그 흐름을 시작하는 것이다.
10시 30분, 작은 보트를 타고 Philae 섬으로 건너갔다. 오시리스, 호루스신의 성스러운 Philae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섬에 도착하기 직전 엔진이 꺼졌지만 간신히 상륙은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신전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신전이라고 했다. Aswan댐에 수몰되기 직전 UNESCO에 의해 1972-80년 사이에 신전의 돌 하나하나를 해체해서 원위치보다 20 미터 높은 현 위치로 옮겼다고 했다. 눈부시게 푸르고 맑은 나일강 위의 균형 잡힌 신전 그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그렇게 옮겨놓은 사람들의 손길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조각 하나하나 건물의 구석구석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다.
OBELISK를 만들던 곳으로 갔다. 아프리카 각국으로부터 주요 산물의 집산지였던 Aswan은 주변에 화강암을 채굴하는 주요 채석장도 갖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대부분의 Obelisk는 여기서 완성해서 최종 목적지까지 배로 운반을 했다고 한다. 파리의 콩코드광장 한가운데서 빛나던 오벨리스크, 런던 Thames 강가의 Cleopatra’s Needle 등 크고 작은 아름다운 Obelisk들이 왕국의 유적지에서 옮겨졌지만 원래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거의 만들어진 Obelisk가 버려져 있었다. 커다란 바위를 깨어 이십여미터가 넘는 작품이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가운데 금이 간 것이다.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웠으면 지금까지 그자리에 남겨 놓았을까. 더웠다. 무척 더웠다. 기온이 섭씨 45℃라고 했다. 펄펄끓는 태양이 벌거벗은 사막 위에서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12시 반 드디어 깨끗하고 작은 유람선 REGINA호에 승선. 우리가 사흘 동안 묵을 숙소이다. 말끔한 시골 여관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 부부 외에도 열 쌍 정도의 독일인들과 미국인 노부부가 동승했다. 열사에서 들볶인 뒤의 선실은 낙원이었다. 깨끗하고 시원하고 편안하다. 떠들썩하던 선객들이 각자 방으로 나누어 들자 우리 방은 적막한 산사처럼 고적해 졌다. 선상에서 간단히 점심을 들고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오후 4시 간편한 차림으로 나섰다. 나일강의 전통적 돛단배 페루카를 탔다. 커다란 삼각돛 하나로 배가 움직였다. 역풍에도 앞으로 간다는 배였다. 강 위에 떠서 나일강의 서쪽과 동쪽을 보았다. 완전히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서쪽 누런 모래 언덕은 사막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죽은 자를 위한 곳이었다. 그와 반대로 동쪽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많은 집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늘도 있었다. 이승과 저승이 가슴이 서늘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키치나 섬에 잠깐 올라 현란한 식물원을 둘러 보았다.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이집트 총독을 지낸 Horatio H. Kitchener 경이 Sudan 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인 Mahdi Revolt 를 진압한 공으로 이집트 정부로부터 하사받은 작은 섬이었다. 둘레가 모두 750 미터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은 키치너 한 사람의 뜻으로 여러나라에서 모은 식물과 새들로 가득찬 별천지가 되어 있었다. 아스완의 맑은 물과 쾌적한 공기 그리고 기화요초들의 투명한 색깔, 온갖 새소리가 방문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지상의 낙원이었다. 한 순간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나그네들은 섬의 아늑한 찻집에 앉아 여러 종류의 차를 홀짝거리며 아름다운 풍광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페루카로 키치나보다 조금 큰 엘레판틴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옛날 코끼리 상아의 집산지이며 세계적인 거래처였다고 했다. 또 나일강의 수위를 재고 범람을 예측하던 “나일 미터”가 있다고 손가락질은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침부터 안내하던 젊은 친구가 좋았다. 카이로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이집트인이 아니예요.”
“그럼 수단에서 왔어요?”
“아니 나는 아프리카인이 아니예요.”
“아 그럼 인도에서 왔군요.”
“아니요 나는 누비아인이지요.”
아아 그 자부심 강한 누비아인이었구나. 고대로부터 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였던 아스완 일대는 누비아인들의 세습지였다. 그들은 심지어 어느 아프리카 국가에도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독립인들이었다. 높은 문화와, 누적된 풍요, 그리고 강한 긍지가 이웃들과 섞이기를 거부하였다. 더구나 관광객들에게 밥 먹듯 바가지를 씌우고 어디서나 돈을 요구하는 이집트인들과 자신들을 차별화 하자는 의도도 있어 보였다.
샤워 후 선상식당으로 갔다. 저녁 만찬 중 선상무대에서 이집트 전용 춤판이 벌어졌다. 카라카디라는 술 같은 음료를 마시며 편안하게 공연을 관람했다. 작은 배위의 공연이라 요란하지 않았다. 외국인들도 모두 편안하게 자리잡고 앉아 음식과 맑고 서늘한 나일의 저녁을 즐겼다. 그들의 늑대울음 같은 노래에 맞춰 이집트 춤이 끝없이 계속 되었다.
9시도 되기 전에 골아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