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史] ④1987년 노사분규는 ‘민주화+산업화’ 공존 계기
북한과의 관계는 우리 주변에 늘 도사리고 있던 위기의 하나였다. 1970년대 초 우리는 북한보다 살기 어려웠고 해외에서 북한 사람, 특히 김일성 초상 배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외국여행 하는 사람들에게 정부는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도록 하였다. “북한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다. 자칫 잘못하면 당신들은 그들에게?해코지 당할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 북한사람과 잘못 교류하면 형무소에 간다고 위협도 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북한대사관이 있었고 우리는 KOTRA 밖에 없었다.
북한의 외무부 장관이 와서는 “한반도에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떠들어서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한 활자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큰 프로젝트가 걸려있던 우리는 새가슴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우리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 프로젝트가 종결될 때쯤 오히려 북한대사관 직원이 우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만나 우리는 가끔 그들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가지고 간 김치통조림이나 마늘장아찌를 권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도망치기 바빴다. 어느새 북한과 삶의 수준이 역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의 지위를 한 단계 한 단계 쌓아가는 동안 우리도 모르게 두려움은 우리의 경제시스템과 사회체제에 대한 자신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숨을 돌릴만?하자 1980년대 초의 위기가 왔다. 세계적인 금융위기였다. 투기성 자본들이 건실한 해운회사들까지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불황의 터널이라고 불렀다. 세계의 은행들이 넘쳐나는 돈을 투기꾼들에게 빌려 주고 회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Bank of America가 파산 직전까지 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한국의 조선산업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한국 조선산업은 위기나 불황을 먹고 자라는 불사조 같았다. 그 불황은 일본에게 보다 심각했다. 일본 조선업계의 한 원로는 “모자를 벗고 작별인사를 할 때가 왔다”고? 공식석상에서 말했다. 우리는 그때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도에서 활로를 뚫었다.
나는 인도국영해운의 간디 회장과 마주앉았다. 그가 물었다. “미스터 황, 내가 이번에 우리 프로젝트를 10년도 되지 않은 한국조선소에 준다면 조선역사가 100년이 넘은 인도조선소에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요?” 그때까지 그들에게 한국은 기술적으로 까마득히 뒤떨어진 나라였다. 그때쯤 우리는 상당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인도 조선소에 설명하실 것 없습니다. 그들에게 같은 기회를 주십시오. 그들이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과 같은 오퍼를 내거나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면 당연히 그들이 이 프로젝트를 가져가야지요.”
인도인 특유의 요란한 경쟁을 통해 우리는 일본, 영국, 독일조선소들을 제치고 그 당시 최대의 프로젝트를 따내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와 연결해서 인도 석유성의 석유생산시설을 연달아 수주하게 되었다.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제일의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아 나갔던 것이다.
다음 위기는 1987년에 왔다. 이번은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 내부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었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노사분규였다. 우리는 아주 어려운 한 해를 보내야 했다. 노사간의 신뢰가 깨지고 산업의 구조적 질서도 붕괴되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태였다. 유럽의 삼류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한국으로 몰려들어 전통적 한국사회 구조를 뿌리 채 엎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한국이 어려움을 겪자 “모자를 벗고 퇴장하겠다”던 일본은 재입장을 하였다. 크나큰 위기였다.
그러나 그 위기가 다시 한국 조선공업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노사관계를 성숙시켜 생산체질을 일거에 단단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산업현대화에 민주화가 함께 든든히 접목된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1987년 1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한 해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한 해의 적자는 그 뒤로 다가올 오랜 기간의 번영에 대한 확고한 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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