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史] ②정주영, 지폐속 ‘거북선’ 보여주며 영국지원 이끌어내

1970년 현대중공업이 VLCC 건조를 계획했을 때 처음 협조를 요청했던 곳은 일본이었다. 50년대 중반부터 세계 조선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던 일본은 협조를 거절했다. 그것은 예상됐던 일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경쟁자를 옆집에 두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망설이지 않고 조선산업의 본산인 영국으로 쫓아 들어갔다.

정 회장에게는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현대자동차를 시작하고자 GM과 포드를 접촉했을 때 그들의 고압적 횡포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기업의 파트너가 아니라 하나의 종속적 하청업체로 묶어놓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위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이탈리아의 세계적 자동차 설계가인 주지아로 회장에게 날라갔다. 그리고 포니라는 고유모델을 설계시켰고 전대미문의 성공신화를 이루었다.

사양화되어 가던 영국 조선산업은 기꺼이 현대를 도왔다. 선박건조에 관련된 기술뿐 아니라 선박의 기본설계, 부품공급, 선주와의 협상, 금융 주선, 조선소 장비공급, 심지어 법률자문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돕기 시작했다. 조선소도 없이 선박 발주를 받았고, 확실한 선박계약을 맺기 전 조선소 건설을 위한 자금융자를 받아 냈다.

정주영 회장의 뛰어난 순발력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이제 신화가 되었다. 거북선이 인쇄된 500원짜리 지폐를 바클레이 은행에 보이며 한국 조선산업의 역사적 전통을 확신시킨 일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런 성공의 신화는 한 개인의 엄청난 성취이기도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세계시장이 대형 조선소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고, 필연적으로 그러한 기대를 채워 줄만한 곳이 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산업이 한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께다. 필자는 현대중공업 훈련생 1진 30명과 함께 1972년 3월 스코틀랜드에 있는 스콧리트고(Scot Lithgow) 조선소에서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처음 보는 VLCC는 당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조선공학의 개념을 뛰어넘는 괴물이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힘이다” 라며 억지로 버텨냈다. 그러면서도 Scot Lithgow 조선소의 친구들에게는 큰 소리를 쳤다.

“너희들은 지금 배의 절반을 지었지만 완성된 배는 우리 울산조선소에서 더 먼저 나올 것이다. 배의 성능도 우리 것이 휠씬 좋을 것이다.” 어렵고 가난했지만 우리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고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2년이나 늦게 시작한 우리가 배를 먼저 인도했고 배의 속도도 우리 것이 0.5노트 정도 빨랐다.

6개월간의 훈련을 끝내고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부임했다. 막 시작된 조선소를 위해 기술자료의 도입과 조선소 기자재 및 선박부품의 구입 업무를 본궤도에 올리는 게 내 임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늦춰져서 좀 실망스러웠지만 그 7~8개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모든 기술관계 기관들과 교제할 수 있었고 금융, 선급, 법률기관에 종사하는 많은 평생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조선기자재 공급업체들도 우리들의 스승이었다.?물론 선주 사무실의 중요 멤버들은 모든 업무의 중심이 되는 파트너였다.

그때는 VLCC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은 세상이었다. 제1차 오일쇼크 뒤 각국은 원유를 한 방울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가장 경제적인 수송수단으로 VLCC확보는 필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대는 조선소를 완성하기도 전에 12척의 VLCC를 수주하였다. 1년 동안 선가도 3000만 달러에서 5500만 달러로 뛰어 올랐다. 조선소는 오래오래 태평성대를 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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